부르심에 순종하라(붙좇는 믿음)!

faith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06 views
Notes
Transcript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오늘도 자격없는 우리들을 불러주셔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앉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한량없는 은혜로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난 삼일 동안에도 세상에서 방황하고 세파에 시달려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주님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사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안수하여 주사 깨끗하게 나음을 입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중보할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가 이곳, 믿음의 공동체안에 일어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성도로 성장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이 곳에서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사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좇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우리들의 모든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양」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읽을 말씀: 룻기 1:11-18(구약 p403)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 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말씀나눔」
인터넷에서 시작된 “시월드”라는 말이 사용된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시집이 전혀 다른 세계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명절이 가까이 오면 더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스개소리로 시월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며느리들은 “시”자가 들어간 모든 것에 거부감이 있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넌센스 퀴즈 한번 풀어보실까요?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시금치입니다.
한 문제 더 해볼까요?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경은 무엇일까요?
네^^ 시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오늘 본문에는 시댁을 향해 기를 쓰고, 목숨 걸고 가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향을 향하여 목숨 걸고 붙좇아간 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합독한 본문은 사시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멕렉이라는 사람이 흉년이 들자 먹을 양식을 찾아 모압으로 건너가면서 오늘 본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의 왕이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였던 베들레헴 지명의 뜻은 ‘떡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생명의 양식이 있는 하나님의 땅을 떠나서 눈에 보기에 풍족해 보이는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갈라서면서 눈에 보기에 풍족해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사기 당시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기였습니다(사17:6, 21:25). 따라서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한다고 해서 이를 두고 정죄할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족함을 찾아서 모압으로 간 엘리멜렉은 그 곳에서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멕렉이 죽고 나자 두 아들들은 모압에서 아내를 얻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의 이름은 첫째는 룻이고 둘째는 오르바였습니다. 이제는 먹고 살만하고 자식들도 결혼시켜 근심이 없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두 아들마저 후손이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풍요로움을 찾아 모압으로 이주한지 10년이 흐른 뒤, 처음 기대와는 다르게 집안은 완전히 풍지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엘리멜렉 집안의 대가 끊기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나오미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단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두 며느리들도 나오미를 따라 나섰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 나선 두 며느리들에게 너희들은 아직 젊고 나는 늙어서 너희들에게 남편의 집에서 누리는 평안을 줄 수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시어머니인 자신을 따라 낯선 땅에 와서 고생하지 말고 고향을 돌아가서 재혼하여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자신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강권함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큰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죽기 살기로 나오미를 붙좇아 갑니다.
여기서 룻의 결심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을 한 번 더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16-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 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룻을 기다리는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이름의 뜻처럼 식량이 풍성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당장 이삭줍기를 해야 했습니다.
룻은 보리 수확이 시작되는 시기에 도착하여 밀 수확을 마무리 할 때까지 대략 3개월 가량을 잠시도 쉴 틈 없이 열심히 이삭을 주었습니다.
당시 이삭줍기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들처럼 사회적으로 절대적 약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복지 제도였습니다.
즉, 절대로 녹록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줄곧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던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결과적으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기업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룻은 보아스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남편의 집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이자 미망인으로서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보아스를 통해서 고엘의 수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를 붙좇았던 룻은 오벳을 낳아 상실 위기에 있던 엘리멜렉의 기업을 회복하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 때는 이러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지만,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룻의 충성심은 단순히 시어머니 나오미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룻의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말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향한 충성심은 곧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충성되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아감으로서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을 붙잡고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룻이 어떤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룻은 그저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를 쓰고 하나님을 붙좇았더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합독한 룻기는 히브리 성경에서 지혜문헌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이 지혜 문학에 속하는 말씀이라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고 적용해야 할 교훈이 반드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순종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에서는 룻기가 사사기 뒤에 배치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시가서인 잠언 뒤에 위치하여 지혜서인 다섯 두루마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룻기 앞에 배치된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31장을 읽고 룻기를 읽는다면 독자들은 룻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현숙한 여인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가정으로 복귀하시면 오늘 본문인 룻기를 염두에 두고 잠언 31장 말씀을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31장 말씀 안에서 보아스와 룻이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풍요로움을 찾아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모압으로 떠났던 엘리멜렉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눈에 보기에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것처럼, 엘리멜렉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모압으로 향하였습니다. 잠언14:12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렸던 엘리멜렉이 보기에 바른 길이며, 올바른 판단이며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모압으로의 이주는 결국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풍요로움을 기대하고 결단하였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보내고 홀로 된 나오미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오미와 같이 하나님께 되돌아오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에 위치한 말라기 4장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선지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침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소리쳤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부르짖으신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회개라고 번역하는 단어(슈브)는 되돌아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께로 다시 되돌아옴으로서 자신들의 가정을 모압으로 이끌어 내었던 몰렉과 맘모니즘을 떨쳐 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같이 되돌아 올 수 있도록 경고하심과 동시에, 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초청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언급대로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각자 제 길로 가기 바빴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룻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지 않고 모압에 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나오미를 따라 영원한 양식이 있는 베들레헴, 즉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에서 나오미가 소원하였던 것처럼,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는 일’이 베들레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생각을 보기 좋게 깨뜨리시고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지금 우리는 엘리멜렉처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이끌려 당장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을 최우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은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오르바와 같은 삶, 다시 말하면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이생의 염려과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조금 해결 되는 듯... 하다가도 다시 문제가 악화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어떻게 진행을 해도 완전한 해결을 해주지 못하고 결국은 내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가장 현명하고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해결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을 붙좇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 염려 그리고 재물과 향락에 사로잡혀 있던 내 마음을 깨드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그 초청에 응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마치 마태복은 22장에 잔치를 벌여 놓고 손님을 청하지만 초청에 응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초청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은”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심으로 영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의 주인이 되시어서 우리 모두를 불러 주셨지만, 이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보다 하나님이 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주님을 붙좇아야합니다.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아 이스라엘의 백성이 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또한 끊임없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붙좇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영적 전쟁의 전쟁터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흔드는 세력들이 있고,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 대적들이 파 놓은 함정으로 인해서 우리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붙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익숙하였던 옛 습관과 터전을 버려야 합니다.
룻이 자신에게 익숙하였던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왔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 이외에 신뢰하고 있었던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나의 죄가 가득한 터전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내 안에 옛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나를 혼란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날마다 시퍼렇게 되살아나는 옛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옛 사람이 끊임없이 살아나는 문제는 사도바울도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며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심지어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 (딤전1:15)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를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결하였을까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신의 옛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붙좇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좇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준다고 오늘 약속해 주십니까?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바라고 원하며 찾아다니던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천국에서의 우리의 기업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들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남아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회복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믿음의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면, 수많은 성도들이 돌에 맞아 죽고 톱으로 켜서 죽고 칼로 베임을 당하고 집을 잃고 토굴과 암벽 사이로 숨어들어 유리방황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실패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생전에 두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에게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순교한 성도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히11:40)
히브리서 11:38-40에 보면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생명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좋은 것을 예비하시며 하나님을 찾는 모든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룻은 이방 여인 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이 모든 것을 관여치 않고 시어머지 나오미를 공양하고, 고엘 제도의 수혜를 입을 수 있도록 권면한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할 수 있었으며, 나이 많은 보아스로부터 은혜(헤세드)를 입기를 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룻이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단 한 가지! 모압을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안주하려 하는 모압을 떠나 온전한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양식이 있는 곳(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 노래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잔치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저런 조건과 상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순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가정교회 세미나에 가면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성경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던 내 옛 습관, 나의 모압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붙좇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평가하고 비판하든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이 나를 덮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사모하며, 우리에게 예비하신 참 평안과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귀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좇는 믿음의 삶에 대해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되살아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하는 옛 사람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복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갈 소망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아 있을 때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되게 주님을 붙쫓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낙담되도록 흔들어대는 대적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또한 옛 사람의 유혹에 다시 악인들의 자리에 앉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 평안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안목의 정욕에 휘둘려 머물고자 했던 우리들의 모압을 떠나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귀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좇는 믿음의 삶에 대해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되살아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하는 옛 사람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복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갈 소망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아 있을 때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되게 주님을 붙쫓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낙담되도록 흔들어대는 대적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또한 옛 사람의 유혹에 다시 악인들의 자리에 앉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 평안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안목의 정욕에 휘둘려 머물고자 했던 우리들의 모압을 떠나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오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믿음의 결단 을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오직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하라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하시면 하지 않는 순전한 믿음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주님 말씀하시면”을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