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5 더리버 금요기도회 (눅4:18-19)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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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4:18–19 NKRV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ㅁ 지난 시간
2021.06.04 더리버 금요기도회 (요14:16-21) '생수의 근원이신 성령님'
Ⅰ. 예수님의 약속(행1:4)
1.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임(요14:16)
2. 약속하신 것을 기다릴 것(행1:4)
Ⅱ. 보혜사 성령(요14:16)
1. 진리의 영이심(요14:16)
2. 영원히 함께 하심(요14:16)
Ⅲ. 성령의 강림(행2:1)
1. 모든 성령을 충만히 받았음(행2:4)
2. 큰 부흥이 일어남(행2:41)
2021.06.11 더리버 금요기도회 (행1:8) '선교의 영이신 성령님'
Ⅰ. 하나님 나라의 확장(마12:28)
1. 하나님 나라의 전파(막1:15)
2.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마12:28)
Ⅱ. 성령의 역사(요14:26)
1. 함께 하심(요14:16)
2.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요14:26)
3. 회개케 하시고 믿게 하심(고전12:3)
Ⅲ. 선교의 사명(행1:8)
1. 선교의 영인 성령(행4:31)
2.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눅24:49)
2021.06.18 더리버 금요기도회 (엡5:15-21) '충만함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
Ⅰ. 성령을 받으라(행1:4)
1. 성령 강림의 약속(행1:4)
2. 성령을 받으라(행19:2)
Ⅱ. 성령의 은사(고전14:12)
1.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고전12:8)
2. 각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심(고전12:7)
3. 은사의 목적(고전14:12)
Ⅲ. 성령 충만한 성도(엡5:18)
1. 성령 충만의 명령(엡5:18)
2. 성령께 순종하는 성도(행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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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성령을 받으려면(엡5:18)
기독교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성령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으로서 하나님의 영이며,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주심으로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강요해서 받을 수 없듯이 성령 또한 떼를 써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방언을 하냐, 하지 못하냐에 따라 판가름하는 것은 극히 편협된 사고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다음과 같은 신앙 행위를 통해 성령을 받는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Ⅰ. 인간의 죄가 사함을 얻을 때
1.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께서는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공식적인 의식을 치름으로써 사생활을 마감하고 공생애로 들어가는 절차를 밟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했습니다(마3:16).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에게 죄가 있어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세례의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가 죄사함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갖게 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부터입니다.
사도행전 2:38 NKRV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2:38 의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세례의 모습만을 가지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2. 진정으로 회개할 때
회개라는 말은 희랍어로 "메타노이아"인데 이 말은 "뒤로 돌아선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제1관문입니다. 이제껏 살아오던 삶의 모습에서 완전히 전환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여 새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도 회개했습니다(눅22:62).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를 각오할만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로마서 13:13–14 NKRV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중세기의 신학을 지배했던 '어거스틴'도 타락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던 중 홀연히 성경을 읽으라는 음성을 따라 <롬 13:13>이하의 말씀을 읽고, 회개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흔적이 그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딤후3:16).
디모데후서 3:16–17 NKRV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때문에 성서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성령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라는 말씀에도 나타나듯이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 NKRV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칼빈'은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고 묵상하는 중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은 듣는 중에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라는 말씀을 볼 때, 성서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의 종들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의 경험들은 오늘도 계속해서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Ⅲ. 기도하는 중에
인간은 맥박이 멈추면 운명을 달리하는 것처럼 기도가 멈추어질 때 영적 생명은 약화됩니다. 기도는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강하게 만들어 주며,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는 말씀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11:13 NKRV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다메섹으로 가던 중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바울이 아나니아를 찾아갔을 때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하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능력이 곳곳에서 나타나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에 와서 성령의 권능을 경험했으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Ⅳ. 당면한 임무를 준비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 요한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눅1:15).
누가복음 1:15 NKRV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또한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도 요한을 낳기 이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눅1:41).
누가복음 1:41 NKRV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40일 동안의 시험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눅4:1).
누가복음 4:1 NKRV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스데반은 순교당하기 전에 성령이 충만해 있었습니다(행7:55).
사도행전 7:55 NKRV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일꾼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은사를 행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면 이는 무익합니다.
요한1서 4:6 NKRV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미혹하게 하는 영(요일4:6)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습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9가지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열매야말로 가장 귀중한 성령의 권능입니다.
나. 성령의 은사(고전12:4)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은사에 관한 바른 이해는 오늘날 특별히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신앙의 가시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표적이라든지 기사 등에 집중되고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은사의 의미가 곡해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도록 해야만 하며, 영적으로 아직 어린 상태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잘 가르쳐야만 하겠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면 활용할 수 없고, 영적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혼란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이에 본문을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도록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Ⅰ. 은사의 기원
은사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원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원을 알아야만 은사의 올바른 분별이 가능하며, 사탄의 계략에 걸려 들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평안이나 기쁨이 없고, 덕을 세우지도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가 받았다는 은사가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1. 성령께서 주심(고전12:11)
은사의 기원은 성령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 NKRV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따라서 누구든지 은사를 소유하고자 하면 성령의 임재가 선행되어야 하며, 누가 은사를 받았다는 말은, 그것이 사탄에게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면 성령이 임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시는 일종의 비상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가진 은사가 성령께서 주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려면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열매는 나무를 속일 수가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 가진 은사는 성령의 은사이고, 이것이 없는 사람들이 가진 은사는 마귀에게서 온 것이므로 치료가 요구됩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무조건 좋아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의 기원인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의 여부를 반드시 시험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이 임의로 주심(고전2:10)
은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임의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결코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분이 주신 은사가 비록 우리가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지라도 과분한 배려인 줄 알아 감사하며 충성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10 NKRV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은사를 나눠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다른 아무도 이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Ⅱ.은사의 목적
하나님께서 성도 개개인에게 은사를 주심은 반드시 목적이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올바르게 선용해야만 은사를 은사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용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가치가 없듯이, 은사의 목적을 모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은사는 오히려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무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1.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심(엡3:16)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첫 번째 목적은 개인의 유익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3:16 NKRV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몸에서 한 자체의 역할이 중요하듯이 교회에서 한 개인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한 지체에서 고장이 생겼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는 곧 병원으로 달려가서 전문가의 진단을 받고 그의 처방을 따라야만 합니다. 한 지체의 고장은 몸 전체의 고장과도 같은 것이므로 신속한 대처가 요망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도 이와 같으며, 은사란 성도로 하여금 강건하여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2.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심(엡4:11)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란 성도 개개인이라는 지체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이며, 따라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는 이 공동체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체를 몸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튼튼한 팔을 가졌는데, 그것을 몸에서 절단해 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은사를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Ⅲ. 은사의 활용
은사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며, 특별히 은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소유했다고 해서 모두가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잘 사용할 때만 유익을 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은사를 소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은사를 활용하는 방법도 중요함을 알아 이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1. 주의 뜻을 행해야 함(마7:21)
은사를 활용하는 기본 원칙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과 무관한 다른 것들을 위해서 이것을 사용코자 하는 사람들은 은사를 잘못 활용하는 것이며, 주님의 칭찬대신 책망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7:21 NKRV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무리 주변의 강력한 요청이 있다 해도 은사는 주의 뜻을 행하는데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2.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함(고전10:31, 15:10)
우리가 은사를 관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것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 NKRV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그토록 많은 일을 했음에도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주의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태도는 도둑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며, 분량의 차이가 있지만 기원이라든지 목적, 활용하는 방법 등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사가 우리의 인생 및 사역에 있어서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되도록, 즉 축복의 도구로 활용토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귀한 것도 잘못 사용하면 축복대신에 저주가 따르는 법입니다.
다. 성령 충만한 성도 (엡3:16)
에베소서 3:16–19 NKRV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한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이란 명칭 속에는 "바람", "순결"의 의미가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삶이란 바람처럼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한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명예나 권세, 돈이나 육체적인 쾌락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위주로 생활하는 방종의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자랑거리를 가졌던 바울은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라고 고백함으로 자신의 성령 충만한 삶을 선언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Ⅰ. 고백의 삶을 삽니다.
1. 내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고백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 고백을 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요16:13).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자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저들의 입으로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10:10 NKRV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고 말함으로 성도의 내적인 고백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2. 외적인 고백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은 내적인 고백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믿음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익한 신앙임을 강조했습니다(약2:14).
야고보서 2:14 NKRV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다음 실천적인 제자들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담대한 믿음의 증언자로 바뀌었습니다(행2:14).
사도행전 2:14 NKRV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의심이 많던 도마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 인도의 선교사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바울은 환난도 곤고함도 핍박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사는 실천적 인간이 되었습니다(롬8:35)
로마서 8:35 NKRV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Ⅱ. 순교의 삶을 삽니다.
순교라는 말은 희랍어 "마르투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본래의 뜻은 "증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순교는 죄를 지은 대가로서 받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의 순교 사례는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전승에 의하며 이사야는 말씀을 전하다가 톱에 켜서 순교를 당했으며(히11:37),
히브리서 11:37–38 NKRV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스가랴는 백성의 타락을 경고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당했습니다(대하24:21).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으로부터 격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은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교의 각오를 의미했습니다. 예루살렘 선교를 위해서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으며(행7:55),
사도행전 7:55 NKRV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마리아 선교를 위해서 빌립은 산 순교자가 되었으며(전승에 의하면 그는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당했다고 함),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사도 바울도 산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야고보도 순교당했습니다(행12:2).
이들 모두는 성령 충만하여 자신있게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죄를 용서하면서 순교했습니다. 로마의 박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교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시대는 당장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순교의 시대는 아닙니다. 순교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필요하면 순교하겠다는 신앙적 각오(행21:13)를 다짐합니다.
사도행전 21:13 NKRV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은 순교자적 정신을 가지고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Ⅲ. 해방된 삶을 삽니다.
누가복음 4:18–19 NKRV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취임 설교(눅4:18)는 인간 해방에 대한 말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인류와 자연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어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한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음과 같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해방된 삶을 살아갑니다.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의 타락 후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끊어졌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두려워하며 숨었습니다(창3:10).
창세기 3:10 NKRV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2.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죄악은 마침내 가인과 아벨의 살인(창4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율법이라는 거대한 방해물이 등장하여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간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했습니다(갈2:16).
갈라디아서 2:16 NKRV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회복
인류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것이라고 했습니다(창3:18).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연을 무참히 짓밟아왔습니다.
로마서 8:22–23 NKRV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바울은 만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당한다고 함으로(롬8:22) 파괴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말했지만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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