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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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깨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만나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 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오늘 본문으로 설교를 들으셨을 때 그 핵심은 만나를 주신 하나님 의 은혜와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만나 이야기를 조금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반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들어 온 만나에 대한 설교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본문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일어난 배경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간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살아왔습니다. 오랜 종노릇에 지칠대로 지쳐있을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출애굽 시켜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밤낮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며 애굽 군대를 홍해에 모두 수장시키는 은혜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직후 수르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고, 바로 그 다음 신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광야 생활이 막 시작된 시점이었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기적이 눈앞에 생생할 그 때 있었던 일이 오늘 본문의 만나 사건입니다. 평범한 만나 이야기를 왜 ‘반란’이라고 이야기 하는지 궁금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그들의 반란으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누며 도대체 만나 이야기가 왜 반란의 이야기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를 원하시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등심화 1]
사실 오늘 본문 말고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이후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오늘 만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래서 만 나 이야기라고 부르기보다는 만나 사건이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듯이 만나라는 것은 오 늘 본문이나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이스라엘의 사십 년간의 광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양식입니다. 하지만 이 만나가 주어지게 된 계기는 이스라엘의 반란에 있었습니다. 만나 사건은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정말로 출애굽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겨우 출애굽 한 지 두 달하고도 반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출애굽 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양식이 다 떨어져 힘들 때가 아니라 겨우 두 달여 지났을 그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 때 이스라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1절과 2절에 반복되어 나오는 이 ‘회중’이라는 단어에는 중요 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특별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 온 회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원망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힘드니 원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원망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원망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단순히 억울하여서 남을 탓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식적이며 합법적인 반란의 성격을 지닌 행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만 읽으면 새로운 환경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탓하는 그런 원망 정도로 읽어지지만, 사실 그 안에는 반란의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말한 한 마디의 그 원망으로 인해 오늘 본문은 반란 사건으로 정의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들의 원망의 내용을 보면 단순한 불편함에서 오는 원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부족한 양식 때문에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어야 했던 말, 생각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 말을 너무도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애 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 것 을 직접 보고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열 번째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실 때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 그 생명을 건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그 때 구원받지 않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때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우리를 잘 살고 있던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에서 먹지도 못하고 죽게 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광야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원망을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구원역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반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녀가 없지만 자녀가 만약 이런 말을 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배 아파 낳은 내 자녀 가,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열심히 양육한 내 자녀가 어느 날 갑자기 와서 모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 가 아빠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다고! 차라리 내 친구 부모님한테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마치 이런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것입니다. 힘들어하고 통곡하여서 기껏 애굽에서 건져주었더니 왜 우리를 여기로 끌고 와서 배고파 죽게 하냐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온 회중을 출애굽 시켜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계획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나름 풍요하게 살던 그 때를 생각하며 지금의 어려운 환경을 가지고 원망만 하는 그런 무지한 자일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풍요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믿음의 세계와는 다른 세속적인 풍요를 동경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그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그 말을 통해 공식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 단 순히 정말 양식만을 구하며 원망했다면 이 사건은 반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마라의 쓴 물로 인해 백성들이 원망하였지만 이 원망의 내용에는 그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만 이 있었고 이 마라 사건은 반란 사건으로 불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78편은 이스라엘의 만나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의지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스라엘의 이 한 마디 원망에 그 정도로 심각한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갈등심화 2]
그런데 이스라엘이 일으킨 반란에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2절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원망한 대상은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단순히 보자면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향한 반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한 반응은 모세와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세와 아론을 향한 반란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반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전]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앞서 말한 내 자녀가 이런 원망을 한다 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원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매를 들어서 가르치는 것이 보통의 반응일 것입니다.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반란의 성격을 가진 말이라면 매를 드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 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반란 사건에서 보통은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반란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잘못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만나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례적으로 이스라엘의 불만사항을 받아들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서는 이제 갓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보시며 그들의 불신앙과 반란에 대해서 인내하시고 관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반란을 도리어 교육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만나를 거두는 것에 대한 법을 정해 주시는데 ‘일용할 양식’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광야의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에서 구하는 그 ‘일용할 양식’과 같은 의미입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양식을 통해서 매 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학교에서 교수님과 함께 이스라엘 탐방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광야를 한번 체험해 보았는데 정말로 광야는 말 그대로 광야였습니다. 지금이야 관광객을 위해서 광야 체험 을 한다고 광야 안에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종종 먹을 것을 파는 그런 장소가 있기 는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주한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광야에 가보니 정말 풀이 자 라 있는 곳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그런 삭막한 곳이 광야라는 곳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곳에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저도 아마 비슷한 원망을 모세에게 했을 것만 같은 그런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처럼 광야의 생활이라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 자체가 정말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하겠다고 하신 목적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을 누리게 하신 것은 땅 위의 풍요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구원받은 목적에 따라 살아가기 원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거둘 때 일용할 것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 까지는 미리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을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내일은 만 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늘 먹을 일용할 양식보다 더 걷어서 내일까지 대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날마다 만나를 주겠노라고 약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만나도 주시고 또 고기를 원했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도 주셨습니다. 그것도 풍 성히 그들에게 주셔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의 배를 부르게 하신 목적은 12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 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마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원망한 그 말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백성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요구를 친히 들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 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때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 경험]
부족한 양식 때문에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였던 백성들의 반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부정하는 가장 큰 반란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구원 받기 이전의 세상적인 삶을 그리워한 불신행위였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와 비슷한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결과가 이런 원망이었다면 우리는 결 코 이 원망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복수하고 복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이런 불신앙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으로 그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 푸신 것은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인도자가 되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준행함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 충분히 이 만나가 오래 유지되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시고 매일 만나를 거두게 하신 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날마다 새롭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가졌던 세상의 모든 욕망과 욕심을 다 벗어버리기 원하셨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기 원하신 것입니다.
[비전 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 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며 구원자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매일 일용할 것들로 채우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관심은 하나님 그분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매일 주어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가운데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이 여정에서 우리에게도 양식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으며 약속 의 땅으로 갔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만나와 같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생명 의 떡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영원한 생명의 떡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매일 매일 구해야 하는 것은 날마다 주시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매일 취해야만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하게 살아가며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굳건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구원 받기 이전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부정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 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함께 살아가는 이 땅위에서의 삶에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만을 취하며 살아갑시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내일도 주실 것을 신뢰합시다.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로 채우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취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