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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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정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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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하철을 탔는데 한 아주머니 옆에 어린 남자아이가 한 명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허름한 옷에 흙먼지가 붙은 작업복을 입은 중년 아저씨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아이가 귀엽게 생겨서 작업복 입은 중년분이 그 아이를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어머니가 그걸 보더니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버렸습니다.
이 행동때문에 중년분은 너무 얼굴이 발개져서 허공을 쳐다보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좋은 정장을 입은 중년분이 그 아이를 보고 웃었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비싼 옷가게 가보십시오.
손님들이 부자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대우해주는 게 달라집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재물입니다.
돈이 많으면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인척 목에 힘을 주고 행동합니다.
자기가 높아진 거 같은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면 어떤가요?
어디를 가도 주눅들고,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낮아진 거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다닐 때에도 두 부류의 친구들이 존재했습니다.
나이키를 신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말이죠.
그것 자체가 서로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 였습니다.
그래도 학교는 집이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인정해주긴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보나요?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앞서 1장에서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강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행하는 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헛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과 행함이 불일치하는 구체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사회적 경제적 차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잘먹고 잘사는 부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만 좀 타협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텐데 꼭 이렇게 살아야하나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유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방문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끼고 온 것입니다.
누가봐도 그가 부자이며 유력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가난한 자도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자 부자에게는 좋은 자리에 앉으라며 안내를 해줬고, 가난한 자에게는 그냥 알아서 앉으라고 대충 말한 것입니다.
3절 보십시오.
부자한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아니면 내 발 밑에 앉든지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자는 우대해주고, 가난한 자는 무시한 것입니다.
저자인 야고보는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난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겉모습보고 차별대우하는 것은 나쁜 생각, 악한 생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악하다는 것일까요?
그들은 신앙적 기준이 아니라 재물이라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믿음을 말하지만 마음 속에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앞서 1장에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두 마음이 자신들의 행동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절에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이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없을 거 같지만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교회안에는 분명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 재정에 보탬이 많이 되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오면 목사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는 것을 설교도하고 스스로 알면서도 행동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부목사 심방보내면서 부자는 자기가 직접 심방합니다.
어떤 교회는 헌금규모를 살펴서 부자들을 특별관리하기도 합니다.
장로들도 주로 부자들 세우려고 하고 교회 리더도 그런 사람들 위주로 세우려고 합니다.
돈 없으면 장로하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또 부자가 교회에서 떠나려고 하면 담임목사가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죠.
그런데 가난한 자는 사라져도 그리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당시 교회에도 있었고, 지금의 한국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모두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길래 우리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될까요?
먼저, 많은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눈에 보이게 직접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 속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는 척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돈없고, 빽없는 사람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다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그들을 자신의 자녀 삼으시고,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부요한 자’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 가난한 자들이란 배고프고, 의지할 곳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밖에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궁핍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가난한 자들이 주님만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모두 재물만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중에도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부자이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난한 자’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믿음의 부요한 자’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실거에요.
예를 들어, 삼성의 상속자는 누구죠?
아들이겠죠.
그는 무엇을 물려받나요?
그는 삼성이라는 그룹을 물려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은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겠죠.
하나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보통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눈에 보이는 지리적 ‘나라’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모든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속에 구원도 있고, 영생도 있고, 사랑과 자유도 있고, 기쁨과 평화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려받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실제 누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다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모순되고 어리석은 짓인지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자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법정으로 끌고가 억울한 판결을 받게 하여 그들의 것들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법관들도 부패해서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문제가 생길때마다 법정에 가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그들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악한 자들인데 그들을 교회에서 우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8절에서 ‘으뜸가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웃’이 누구일까요?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대우한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할까요?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대우하는 게 그리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간음하는 것은 큰 죄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은밀하게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게 결코 작은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떤 것은 가벼운 말씀이고, 어떤 것은 무거운 말씀이고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목록들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말씀을 어떤 것은 더 무겁게 어떤 것은 가볍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겁게 여기는 말씀 2가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를 예로 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일 큰 죄로 여기던 게 간음죄와 살인죄 였습니다.
살인죄뿐만 아니라 간음죄도 사형으로 다스릴 정도로 이 두 죄는 하나님 말씀중 가장 무거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간음은 하지 않았지만 살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 중 한 가지만 어기고 다른 한 가지는 어기지 않은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가지를 어긴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 전체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말씀 전체를 어긴 것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 차별대우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간음죄, 살인죄를 예로 들었을까요?
가난한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이 작은 죄가 아니라 간음이나 살인죄와 같이 심각한 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거운 죄로 여기는 간음죄, 살인죄만큼이나 사람을 세상기준으로 판단하고 차별대우하는 것도 중한 죄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마음 속에서 사람을 내 위인지 아래인지 판단하고 차별대우한다면 그것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이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말씀아닐까요?
참 이 부분에서 제 스스로가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제가 전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때때로 제 마음 속에 사람에 대한 서열이 있었던 거 같아요.
담임목사님이 더 주목하는 사람같으면 더 관심을 주려 했습니다.
놓치면 욕먹으니까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하나님 시각으로 보면 다 똑같이 중요한 사람인데, 누구는 좀 더 중요한 사람, 누구는 덜 중요한 사람이 제 마음 속에 있었던 거 같습니다.
주님 앞에 참 부끄러운 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와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소외받는 자들인데 교회에서까지 소외받는다면 그것만큼 잔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시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했는 지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편에서 세상의 눈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서 긍휼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13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잣대로 그 사람을 무자비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내가 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하나님도 나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과 분리될 수 있는 지 보았습니다.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동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내 위는 누구이고, 내 아래는 누구입니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준과 세상 기준을 모두 마음 속에 품고 두 마음으로 살아가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너희 집 임대주택인지, 아닌 지 묻는다고 합니다.
임대주택 사는 애는 차별한다고 합니다.
또한 몇 해전만해도 아이들이 다 교복처럼 노스페이스 옷 입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때문에 부모님들이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더 비싼 옷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할까봐 부모들이 걱정한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 차별대우 받지 않게 할려고 그러는 것인데 그렇다고 차별이 없어질까요?
내가 남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되면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가진 부자같지만 텅빈 깡통처럼 거지같은 자가 있고, 아무 것도 없는 거지같지만 속이 꽉찬 그런 부자같은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서 믿음의 부요한 자, 믿음의 부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세상 기준 따라가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말고 살아갑시다.
열가지 알지만 한가지도 순종하지 못하는 자보다 한가지만 알지라도 한가지를 순종할 줄 아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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