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동역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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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주 전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내용이 기억나시는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찾아오셔서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셨고,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회막에서 그리고 이후 성전에 임재하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깨닫고 순종하고 따르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 인격적 관계를 저버리고 범죄하여서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제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부으시고,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므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진리의 영 성령이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회막이나 성전보다 훨씬 위대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격적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2주전에 나눈 내용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내용은 지난 번 내용과 함께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목적과 뜻을 함께 이루는 동역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아담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동역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אָדָ֖ם) = ‘사람'
‘아담'은 히브리어인데, 사실 그 의미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살펴보면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누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어떻게 하도록 하셨지요? 네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처럼 지혜와 지식,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지난 번에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함께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의도와 감정과 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사람인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피조물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 삼으셨다는 점입니다. 특히, 오직 창조주만 가지고 계시는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런즉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온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고, 그 의도를 깨달으며, 온 만물과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감정과 의지를 느끼며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해 주신 이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얼마나 최종적이었는지, 아담이 이 권세를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절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요. 사탄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자신이 가진 권세는 넘겨받은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탄의 주장에 반박하시나요? 아니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장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제 넘겨받은 것일까요? 이 권세는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따먹고 아담에게 ‘죄'와 ‘죽음'이 들어왔을 때 입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사탄에게 복종함으로 그 권세를 사탄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은 사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4)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단순히 고용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신실한 아들에게 자신의 기업을 물려준 것과 비슷합니다. 아버지와 친밀한 아들은 그 기업이 비록 작은 슈퍼마켓이라고 할지라도 그 기업을 이룬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고 운영하겠지요. 하나님과 아담은 그 이상의 신뢰관계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아담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저버리고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탄에게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권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대신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2. 자기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2. 자기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사탄이 이 땅의 권세를 얻은 이후로 사람에게 죄와 죽음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은 이 때부터 사람을 종으로 삼고 그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해서 이 땅을 인간을 통해 지옥과 같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원칙은 깨지고, 힘과 폭력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이 되었습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살인이 발생하고 남편과 아내는 다투고 약한자는 제압당하는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한 것이지요.
죄의 종이 된 인간의 마음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사람은 이 때부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속에 머물며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뜻은, 마음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일을 가치없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필요 없고, 하나님의 의중과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은 안중에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삶의 주인은 ‘내'가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오직 ‘나'가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목적도 오직 ‘내 목적'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따위는 이제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하시는 일 같은 것은 관심도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 오직 자신이 욕망하는 목표,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인간의 본성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아담적 죄의 본성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적절한 보수를 받고, 내 집을 마련하고, 괜찮은 사람과 결혼하고, 나를 기쁘게해줄 취미에 집중하며,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 등등 아!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에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을 아시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목적이 ‘자신'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삶이 사탄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할 때 “너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이 세상의 풍조를 따랐다", 그것은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르는 삶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사탄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The Church of Satan. 이들은 미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한국의 대학교 동아리에도 침투했다는 보고가 있어요.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들은 반기독교를 목표로 하는데 ‘이성주의', ‘과학주의' ‘쾌락주의', 영적인 것은 없음을 말하고 있어요. 이들도 그들의 성경이 있습니다. 사탄경이라고 하는데 사탄경 1장 1절에 이렇게 적혀있어요. “너의 삶의 주인은 너다" 여러분 사탄은 사탄을 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자기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신 사탄을 섬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은 없다, 오직 너의 이성으로만 판단해서 살아가라. 너가 원하는 모든 욕망은 반드시 쟁취해라. 이 땅에서 할 수 없는 일 같은 것은 없다. 네가 행복하게 느끼는 그것을 바로 하라.
사탄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을 종 삼고 이 땅을 통치해왔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자신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사탄을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진 본질적으로 타락한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다시 사람과 친밀히 교통하시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포기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살인자 가인을 대신해서 셋을 주셨습니다. 셋의 자손을 통해 하나님은 노아를 예비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르심에는 인류와 동역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백성을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특히 10번째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과 염소의 피를 문지방에 바를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사자를 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양과 염소의 피가 죽음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홍해 앞 바로의 군사들 앞에 죽음의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가르셔서 원수는 빠져죽게 하시고 이스라엘은 물 가운데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물 가운데서 들어갔다 나오므로 다시 살림을 받은 것이죠. 이렇듯 이스라엘은 명백히 하나님께 구원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왜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는 동역자로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온 세계 중에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이 정하신 제의의식으로 씻어주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 열방을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방의 모든 가증한 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스라엘과 온 열방에 실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고 열방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광야에서 끊임없이 불평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입을 것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오게 하셨고, 광야에서 그들의 옷이 헤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썩어질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의중에도 없고 끊임없이 살아가는 문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 가운데 살아갈 때 나머지 필요는 전부 채워주시리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졌던 믿음은 전혀 그들 가운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눈 앞에서 수 없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랬습니다.
이들이 가네스 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 앞에 섰을 때 결국 믿음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 버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위용에 특히 거인 족속 아낙자손이 지키고 있는 것을 정탐꾼을 통해 보고받았을 때 온 회중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원망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내며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쳤습니다. 출애굽시 경험했던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은 전혀 없고, 그들의 회막 가운데 영광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은 분인 것 처럼 취급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과 뜻은 언제 받았냐는 듯이 짓밟아 버리고 만 것이지요.
구원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관심이 없고 언제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환경과 처지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담겨있는 깊은 의중과 의도, 감정과 의지는 느껴지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뜻을 이루실 것도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편과 히브리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는 보았으나, 항상 미혹되어 모세와는 달리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히 3:7-10; 시편 103:7).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리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던지 다 죽여버리고 ‘모세 너를 통해 새 백성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격한 진노 중에 모세가 온유함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이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하기까지 중보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십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반응했던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광야 1세대 전원은 그 반역한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을 포기한 인생은 광야에서 자신을 위해 그냥 먹고 마시다가 죽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포기한 자의 마지막을 성경역사는 무섭게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타락한 신앙을 혼합주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자신의 욕망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이신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실 삶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준과 노력과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의 삶에 주로서 통치하셔서 이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원하지도 구하지도 않는 그런 신앙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기복주의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나 그것을 자신의 영광을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은 율법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하나 성령의 능력 안에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모르면 인본주의에 빠집니다. 이 모든 형태가 하나님과 동역할 수 없는 거짓 신앙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역자의 삶을 회복하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역자의 삶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으려는 인간 본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신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역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었던 것과 같은 환경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신 상태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들을 시험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는 먹고사는 문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위해 왜곡해서 쓰는 것, 권력과 명예를 위해 이 세상을 따르는 것 모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먹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지만, 예수님은 어떤 육신적 충족이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이 “이 분이야 말로 오실 메시아”다 라고 외치며 자신을 왕 삼으려고하자 그것을 거부하시고 그 혼합주의적 신앙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를 회복시키려고 나를 보내셨다는 그 뜻은 못보면서, 떡을 먹고 배불러서 나를 왕삼으려고 하느냐?”
요한복음 6:27 (NKRV)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리고 그 양식은 십자가에서 찢을 자신의 피와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살을 찢을 것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양식임을 믿어야 한다. 너희에게 근원적으로 필요한 영적인 양식, 곧 너희의 자기중심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내 살과 피를 대신 찢고 죽는 것이다. 너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된 나를 믿으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나도 너희 안에 거하여 이제 나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일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 삶을 버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셔서 예수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 다시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스리는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회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일을 이루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성령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중심적인 혼합주의 신앙을 버리는 새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동역하기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살 때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함께하셔서 자신이 원래 지음 받은 성품과 개성이 풍성하게 발현되고, 자신이 회복될 뿐 아니라 자신이 부름받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한 진리의 기준이 그 사람을 통해 회복되게 하므로,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사랑과 평화가 넘치고 억압과 폭력과 힘의 원리는 물러가고 그 사람으로 인해 공의와 정의가 그곳에 가득한 회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가운데 전도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회복의 역사를 가져오게 됩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