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아름다움과 능력(벧전 2:18-25)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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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하게 받는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움이 되며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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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서론
베드로전서라는 짧은 성경을 보면 이 짧은 내용 안에 굉장히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원과 종말에 대해서 다루고 성전과 제사장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세상 권세를 어떻게 대하는지. 일상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룹니다. 구원부터 종말, 일상까지 굉장히 광범위한 내용을 다룹니다.
하워드 마샬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신약학자가 계셨는데, 이분이 “만약에 신약 27권중에 교회를 위해 딱 한 권만 고를 수 있다면 베드로전서를 고르겠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만큼 광범위한 내용을 균형 있게 잘 다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조금 뻥을 섞어서 과장해서 말하자면 베드로전서를 잘 이해해도 기독교의 진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구원과 종말이라는 굉장히 큰 스케일의 내용을 말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두고 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상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고난은 성도의 소명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고난은 성도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8절부터 보면 사도 베드로는 사환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환은 주인에게 고용된 종을 말합니다. 이 때 종은 주인의 소유로 취급됐지만 급여를 받았으며 자신의 몸값을 치르고 자유의 몸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종들이 주인을 두려워하고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기독교가 노예 제도를 인정하나?’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는 갑자기 사회 체제를 뒤엎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체제 전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뤄집니다.
19절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는 종, 오늘날로 적용하면 예수님을 믿는 피고용인, 직장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19절을 보시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말은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 일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20절을 보시면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종이 만약 죄를 지어서 거기에 따라 처벌을 받고 고통을 참는 것에는 칭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습니다. 18절 후반부에 말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주인, 까다로운 고용주도 무시하지 않고 두려움으로 순종하고 선한 일을 행했는데 억울하게 고난당하면 특히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한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18절 후반부에 나오는 ‘까다로운 자들’은 단순히 업무 스타일이 깐깐해서 밑에 사람들을 고생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까다롭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굽었다.’는 뜻인데 실질적인 의미는 정직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까다로운 사람 밑에 있으면 예수님을 잘 믿는 종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도 고통당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임금을 떼어 먹기도 하고 쓸 떼 없는 트집을 잡히기도 하고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일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심지어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부당한 고난을 감내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증명) 고난이 소명이라고 할 때 아마 가장 적절한 인물은 욥일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욥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난 가운데 흔들릴지언정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친구들의 비난과 삶의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결국은 그의 삶이 회복되고 이전보다 더 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욥은 고난을 받음으로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이 돈이 많고 건강해서 믿는 게 아니라 참된 믿음이 있어서 믿는 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고난을 받음으로서 믿음을 증명해냅니다. 성도는 이런 믿음의 고난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적용) 혹시 지금 직장에서 사회생활하면서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안 드는 고용주, 직장 상사, 부하, 거래처 때문에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기도하면 다 잘 풀릴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부당하게 고난 받기 위해 우리가 부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부당하게 고난 받기 위해 성도로 부름 받고 동시에 직장으로도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이겨낼 때 적어도 우리는 참된 성도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2-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
(전환문장) 그러면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 실제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둘 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부당한 고난을 받으면 그것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이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형용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난 받는 결과가 아름다움이라면 그냥 아름답지 않고 고난을 안 받고 싶기도 합니다.
19절과 20절의 아름답다는 번역은 한글 성경만이 가진 독특한 번역입니다. 원어에는 아름답다가 아니라 은혜롭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는 것이 은혜롭다.”라고 하면 또 이게 이해가 잘 안됩니다.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얼마나 다양하게 씁니까? 그래서 이 ‘은혜롭다.’는 말을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영어 성경에는 ‘칭찬 받을 만하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호의를 찾게 하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신용이 있다.’ 등등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을 해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아름답다는 말은 원어에서 은혜롭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전반적으로 은혜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 2절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베드로의 편지가 시작됩니다. 1장 10절에 구원을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은혜라고 묘사합니다. 13절에도 구원을 ‘가져오실 은혜’라고 말합니다. 4장 10절에 교회를 섬기기 위한 은사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베드로전서 전반적으로 은혜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은혜롭다라고 하는 건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증거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어 그대로 표현으로는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이 고난이 우리가 은혜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성경은 굉장히 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것만큼 아름다운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구원 받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고난 받을 때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모습, 구원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 됩니다. 혹시 고난 중에 계십니까? 가정, 직장, 학교 등등의 공동체에서 부당하고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모습이 되셨습니다. 삶에서 당하는 고난은 알고 보니까 하나님 나라의 레드 카펫입니다. 그 레드 카펫의 붉은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 때문에 참으며 은혜 받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봉사하고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섬기는 모습도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 때문에 감당한다면 은혜 받은 증거를 드러내어 더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3- 고난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능력을 얻게 된다..
(전환문장)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고난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명) 21절 상반절까지 우리가 부당한 고난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은혜, 즉 한글 성경의 표현으로는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어서 사도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을 받으신 우리의 참된 모범이신 분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21절에는 우리도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지만 우리 보다 앞서서 고난을 위해 부름 받은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본을 끼쳐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본은 헬라어로 ‘휘포그람모스’인데 신약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여기 본은 교본을 뜻합니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자에다가 줄을 그어가면서 가나다를 배우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교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교본이 없으면 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라는 교본이 없으면 우리가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도 고난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이라는 글자를 점선으로 남겨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글자를 따라 쓸 수 있습니다.
21절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성도의 교본이라고 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22절부터 나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일단 죄가 없으십니다.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19절에 나오는 부당한 고난을 암시합니다. 23절에 보면 욕을 당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똑같이 갚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18절에 사환들이 주인에게 고난당하면 참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종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채찍질 하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23절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여기 부탁은 위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충분히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공의로운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에 죽게 의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부당하게 고난당하시고 모든 심판의 권리를 포기하신 예수님의 사역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25절에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 받으신 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보신 것처럼 21절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교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부당한 고난을 감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죄인들이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감내할 때 우리를 통해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3장 1절을 보시면 고난을 통해 영혼이 돌아오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3장 1절을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아내의 행실을 통해 돌아올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원어상으로 3장 1절에서 ‘이와 같이’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여기 이와 같이는 무엇과 같다는 것을 말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영혼들이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영혼들이 돌아온 것처럼 3장 1절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이 아내의 행실을 통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남자가 아내의 종교나 인간관계나 권리를 다 주장했습니다. 불신자의 아내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내들이 불신자 남편이 주는 부당한 고난을 잘 감내하면 남편이 돌아올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리 될 것이라 합니다.
(적용)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그 고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고난을 버텨내는 것이 참 힘듭니다. 당장 아프고 힘든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은혜를 드러내라, 우리는 고난을 위해 부름 받았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라” 실제로 고난을 당해보면 이런 정답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복음 전파의 능력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부당한 고난일 때,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찾아온 고난일 때 이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고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수한 고난을 복음전파의 원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우리의 고난이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고난을 통한 복음 전파의 능력이 더욱 증폭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능력을 얻는 원리입니다. 고난이 얼마나 아프고 힘듭니까? 이 설교를 하는 저조차도 고난이 오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이런 설교를 하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살 때 기왕지사 고난을 받는다면 고난 가운데 소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고난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 전파의 능력이 됨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것처럼 이 땅의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 교회로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순수한 고난은 복음을 전달하는 능력이 됩니다. 이번 한 주도 고난 가운데 은혜를 드러내고 능력을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찬양 한 곡 부르며 기도로 나아가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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