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기 (3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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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오늘 본문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서론
서론
지난 주
지난 주
사랑의 첫 걸음으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함을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 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을 형상화 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 그 모습을 가지고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우리 헤어져! 라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본론
본론
오늘은
오늘은
사랑의 두 번째 걸음으로서,
지난 주 우리가 살폈던 것과 같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두 번째 걸음으로 옮겨가게 되고, 그 두번째 걸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티비를 보면, 점점 이슈화 되는 사건들이 있는데,
데이트 폭력, 아동학대, 노인학대, 가정폭력, 존속폭행, 존속살인 이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가정폭력을 예로 들어 보자.
모든 가정폭력 사건에서 자녀들을 폭행한 부모님들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일으키는 부모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모습은 바로 자녀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녀를 존중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모는 자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녀가 행동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자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녀가 이렇듯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할 때, 부모는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녀를 폭행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가만히 잘 들여다 보면, 분명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십계명의 1~3계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십계명을 들어오면서 구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 구조에 따르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존중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십계명의 구조에 따라 이웃을, 내 부모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애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데이트 폭력
부모와 자녀사이에서 나타나는 가정폭력, 존속폭행, 존속살인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왕따, 따돌림, 집단 괴롭힘, 학교폭력
더 나아가서 폭넓게는 자연파괴, 외면, 무관심과 같은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존중하기”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게 되고, 무시하는 행동이 바로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삼상 17장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삼상 17장은 골리앗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으로 대략 3미터에 달하고, 그가 사용했던 갑옷은 오천 세겔로 대략 57kg에 달하고, 그가 들고 다녔던 창의 창 날만 대략 7kg, 그러니까 창 전체의 무게는 대략 10~12kg 정도 되었다고 묘사한다.
반면, 골리앗과 맞선 다윗은 이렇게 묘사한다.
“너는 소년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소년이라는 말은 대게 사춘기의 어린 아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남자 아이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쉽게 설명하자면, 최홍만과 초딩의 싸움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왜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서게 되었을까?
삼상 17:26ff에서 그 이유를 대충 볼 수 있는데,
“…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렇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를 했던 것이다.
그런 골리앗을 향해 다윗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명언을 남기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무기도 없이 달랑 물매 하나 가지고 나아가서 골리앗을 처치해 버린다.
삼상 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 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바로, 골리앗과 다윗의 사건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3계명과 관련이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망령되게 하다라는 말은
가치없고 무익한 것, 거짓되고 허위인 상태를 의미한다.
즉, 골리앗이 하나님을 저주했던 것은, 하나님을 모욕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그렇기에 골리앗은 하나님에 대한 존중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하며, 모욕하며 폭력적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골리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몰랐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며,
모든 것을 다 행하실 수 있으시며,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곧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행동을 통해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상대방을 향하여 폭력을 행하게 되고,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학대로, 언어폭력으로, 물리적 폭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음에도
서로를 존중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랑은 폭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골리앗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존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폭력을 행사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골리앗과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결론
결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 보시고, 그 하나님을 얼마나 존중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우리가 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그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신다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으로 초청하신 그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냐?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 제시하는 만큼, 성경이 보여주는 만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며,
내 생각의 틀 속에 가두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저주했던 그 골리앗과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 모습만큼,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그 하나님을 존중하시는 귀한 우리 SFC 운동원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