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3:1-20,엘엘로헤이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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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views용서의 신적 차원, 야곱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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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인생에 가장 극적인 운명적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원수와의 만남입니다. 우리에게 처음부터 원수는 없었겠지요. 어떤 일로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되어 반목하게 되었을 때에는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신적 사랑(divine love)이 모범이 펼쳐집니다. 저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하는 이 33장이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귀향'과 더불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야곱과 에서의 변화입니다. 비겁하고 계산적인 야곱이 이젠 스스로 에서를 만나기 위해 가족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 야곱에게 복수하여 죽일 수 있도록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려온 에서가 야곱에게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에서 그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화해의 드라마는 '야곱이 눈을 들어보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브나엘을 체험한 신앙인은 하나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일상을 소흘히 하는 믿음은 광신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자만이 원수의 얼굴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지만 죽지 않고 그 내면에 하나님의 이미지(imao dei)를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원수의 얼굴(그림자)을 대면할 수 있게 됩니다. 에서는 사탄과 마귀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야곱의 그림자였습니다. 칼 융은 우리 안에 그림자를 포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럴때 우리의 인격은 통합이 되어갑니다.
이제 혼자 얍복강가에 남겨진 야곱은 먼저 보낸 주위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1,2절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여종들과 자식들을 앞으로 보냅니다. 레아와 자식들은 그 다음,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그 뒤에 두었습니다. 인간적인 꾀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야곱은 담대함을 가지고 ‘(맨앞에) 그들 앞에' 나아가서 에서를 맞이했습니다. 야곱의 심리적인 상태가 보입니다. ‘이제 괜찮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의 선두에 선 것입니다. 그가 얍복강가에서 믿음을 받고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많이 가졌다는 것은 많은 책임을 말합니다. 직분은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바르게 이끄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기 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내가 이끌고 있는 무리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사람라는 책임의식입니다.
지금 야곱은 에서에게 나가면서 7번이나 절을 합니다. 에서 형에게 대한 겸허한 모습입니다. 삶의 잘못된 것에 대한 고백을 통해 전적으로 형을 높이게 됩니다. 4절을 보니 놀라운 사건이 일이 일어납니다.
4절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가 달려와서 목을 어긋맞추어 포옹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아버지를 돌아갈 때 아버지가 달려가서 아들을 안고 기쁨으로 맞이한 모습과 에서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며 연결이 됩니다. 10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의 마음이 탕자의 마음과 거의 같습니다. 형이 날 용서해줄까 고민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이 먼저 달려와 자기를 안고 용서해 준 것입니다.
4절에 ‘서로 우니라’ 이것은 그 안에 용서와 사랑과 긍휼 그리고 은혜가 녹아졌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가 딸이 서로 껴앉고 울어본적이 있습니까? 이 광경 가운데 그동안 맺혀진 한와 분노들이 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님이 나를 용서하고 있구나… 느끼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야곱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였습니다. 8절에, 내 주께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10절에,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15절,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여기서 은혜는 헤세드와 비슷한 ‘힌'이라는 은혜의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에게도 사용됩니다. 5절에서도 야곱이 에서에게 고백하는 것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가 동생이 무릎을 꿇고 고백하면서 나올 때 탕자를 안듯이 그를 그냥 안아줍니다.
12절에, 에서가 동행하자고 야곱에게 권합니다.
형과 동생과의 관계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야곱은 신중합니다. 13절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따로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15절에, 에서는 종 몇 사람을 머물게 하겠다고 하지만 야곱은 감시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형님 나대로 내버려달라며 헤어지자고 권합니다. 이후에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 야곱과 에서가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에서의 제안을 따라 세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스스로 매우 천박한 영적 수준에 있다고 해석하면서 야곱은 세상적 편리함과 성공에 안주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화해를 했지만 야곱에게 옛 두려움과 의심이 여전히 거기에 잠복해 있었습니다. 야곱 자신이 에서의 거절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보면 그의 동기들이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15절)
여러분, 에서를 따라 내려가지 않은 것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떨 때는 갈라질때가 좋을 때가 있고 어떨 때는 함께 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좋습니다. 인생에 삶의 자리마다 다 다릅니다. 이제 각자 성인이 된 후로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것도 지혜이고 축복입니다.
20절에,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여기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거기에 집을 짓고 땅을 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변화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 야곱이 경험한 화해와 감격의 은혜가 우리 삶 속에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