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와 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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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37 484
기도 이수현 권사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잘 아는 말씀으로 ‘마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이스라엘이 마라에 이르러 물을 먹으려 했으나 너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되자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어느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시니 이 때에 그 쓰디 쓴 물이 달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이 모든 규례들을 잘 지키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내렸던 질병 중 하나라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라파?

일반적으로 우리는 배가 고픈 사람이 있다면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사람이 있다면 물을 건넨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준다거나, 목 마른 사람에게 양말을 준다는 것은 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목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써서 마시지 못하던 마라의 물을 마시기에 단 물로 바꿔주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너희가 마시지 못하는 물도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꿔주는 여호와임이라’ 라고 말씀하셨어야 맞다. 혹은 ‘너희가 내 계명을 잘 순종하면 나는 애굽에서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니’ 이후에 ‘나는 사랑과 인자의 여호와임이라 혹은 복 주시는 여호와임이라’ 라고 말씀하셨어야 더 논리적으로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라파’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그 말씀 이면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병들어 아픈 상태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디가 그렇게 아플까? 그들이 무슨 질병에 걸렸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료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가? 본문 22절에 이미 그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3일이나 걸었지만 마실 만한 물을 얻지 못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기진할 대로 기진한 상태였는데 마침 ‘마라’ 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물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기뻐했을 것이다. ‘아! 드디어 내 목마름을 좀 해결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물로 달려가서 마시려 했다. 그러나 그 물은 지독히도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었다. 목이 너무나도 마른데 이 물을 마시니 갈증이 배나 더했다. 목이 더 타들어간다. 괴롭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라도 당연히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고통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24절 말씀을 보면 ‘원망함’에 이르렀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원망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모세였지만, 실은 모세를 포함하여 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 불과 3일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앞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열어주셔서 그들이 마른 땅을 건너게 하셨고, 또한 애굽 군대는 바다에 수장시키셨다. 홍해 바다의 기적을 경험하며 뜨겁게 하나님을 찬송했던 그 감격이 채 식기도 전에 며칠 고단했던 것과 갈증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다가 예상치 못했던 고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오면 탄식할 때가 있다. ‘아이고 주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든 시기를 지나가게 하십니까?’ 탄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시편기자도 고난 가운데 탄식했다. 그러나 탄식과 원망은 다르다.
지금 이스라엘의 행동이 단지 소극적인 원망이라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수긍하실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을 보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다보니, 어느샌가 ‘원망'이라는 두 글자가 친숙한 단어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원망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들이 품었던 원망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가 민14:2 에도 등장하는데, 배경이 이렇다. 가나안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후, 이스라엘은 온 회중이 소리높여 통곡하기 시작한다. ‘아이고, 우리가 그냥 애굽 땅에서 평생 종노릇이나 하다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이고, 우리가 그냥 애굽 병사들에게 홍해 앞에서 맞아죽거나, 홍해 바다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가나안 땅 까지 고생 고생하며 왔는데 저 거인들의 손에 죽게 생겼구나, 지금이라도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저 무능한 모세 말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민14: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지금 그들의 원망은 잠시 잠깐 고통과 괴로움으로 인한 탄식의 수준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하나님을 향한 소극적인 원망의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품은 원망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적극적인 불만이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려는 태도이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죄는 사람의 지, 정, 의를 부패시켰다. 그 결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시10:4 을 보면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말씀하는데, 여기서 ‘감찰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돌보다’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진 원망의 마음이 바로 이러하다. 또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갖는 죄의 성향이 바로 이러하다. 모든 자연인들은 이와 같이 자신들의 적극적인 의지로 하나님께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스르려 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려는 본성을 가진다. 이러한 죄인들의 영적 상태는 지금 이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명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지금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 곧 ‘마라’이다. 성경 각주에서 ‘마라’는 ‘쓴 것’이라 되어 있지만 이 의미 외에도 ‘배반하다, 범죄하다, 거역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곳,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한 곳,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곳이 바로 마라였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며 거역했던 죄가 가장 극에 달했던 곳이 어디였는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먼저 사랑을 베푸셨던 그 분께 범죄하며,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내려오신 주님을 거역한 곳이 어디였는가? 골고다였다. 마라는 골고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마라에서 마신 그 물은 이스라엘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갈증과 고통을 일으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라로 인도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죄로 부패한 자들의 상태가 바로 이렇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치료가 필요한 자들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세상에 온갖 생수처럼 보이는 것들이 허다하다. 저 물을 마시면 지금의 내 갈증, 내 공허함, 내 욕구가 충족될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좋게 보이던 물들을 찾아 나아가고 이 물, 저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그 결과 여러분의 갈증, 여러분의 공허함, 여러분의 욕구가 채워지던가? 충족되던가? 참된 만족이 찾아오던가? 아니다. 세상의 온갖 물을 다 가져다 마셔도 결국은 우리 영혼의 갈함을 채워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죄로 부패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지 않고서는 쓴 물만 만날 뿐이다. 고통과 실패의 인생 뿐이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한 방법을 마련하셨다. 이와 같이 죄로 부패하여 죽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한 방법을 마련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25절 상반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죄로 부패한 우리가 백날 마실만한 물을 찾아봐야 매번 마라와 같은 것을 고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그 물은 오직 한 나무를 통해서만 공급된다. 그 나무는 회중들이 소중하게 보관할 때에 생명수가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무는 귀한 것들로 감싸져야 생명수가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무는 반드시 던져져야만 한다.
여기서 ‘던지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던지는 것은 그냥 마구잡이로 던지는게 아니다. 성경 안에서 이 단어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강하게 내던지는 것이다. 출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을 녹여 송아지 신상을 만든다. 모세가 그것을 보는 순간 크게 노하여 하나님이 친히 새기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다. 두 돌판이 깨어질 정도로 강하게 내던졌다. 본문에서 ‘한 나무를 던지다’ 라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쌔게 내던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무가치하게 쓸모없이 여겨 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43:3 를 보면, ‘그 살륙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겔16:5 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즉 본문 25절에서 ‘던지다’ 라는 단어는 아주 무가치하게, 하찮게 여기어 내버려되 부숴질 정도로 강하게 내던짐을 의미한다.
이 의미들을 종합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료하시기 위해 어느 한 나무를 무가치하게, 강하게 내어버리게 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무가치하게 내버림을 당해야 할 자들이 이스라엘이었음에도 하나님은 그들 대신 어느 한 나무를 내어버리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죄인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내버리셔야 했지만, 그들을 대신하여 무가치하게 내던져질, 강하게 내버림을 당할 어떤 존재를 보내어주셨으니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갈3:13 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한 벧전2:24 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부숴지도록 내던져져야 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책과 우리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무가치하게 버림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 위에 임한 모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으셨고, 성부 하나님께도 외면당한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무가치하게 내던져진 한 나무를 통해 이스라엘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듯이 무가치하게 내던져진 그리스도를 통해 택하심을 얻은 죄인들이 죄로부터 고침을 받았다. 한 나무가 내던져짐으로 그 나무를 통해 이스라엘이 단 물을 마셨듯이 메시야께서 내던져짐으로서 택하신 백성들이 그분으로부터 영생하도록 솟아나오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수를 마신 후 엘림이라는 지역에 이른다. ‘엘림’이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큰 나무들’이란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마라에서 던져진 한 나무를 통해 치료받은 후, 비로소 엘림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그들이 마주했던 것은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였다. 이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충분히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넉넉한 물이 있었고, 쉴만한 그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층 더 나아가 물샘이 12개요, 종려나무가 70그루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12지파와 70장로로 구성된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또한 신약의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고치셨고, 주의 백성으로 삼으사 마침내 고단한 광야여정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만한 엘림에 이르게 하셨다. 이를 통해서 그들을 붙들고 가시는 분,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 그들을 책임지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셨던 것이다. 비록 지난 3일 간의 광야 길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아직까지도 약속의 땅까지 가야 할 거리가 한참 남았음에도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맞아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이 여정이 마치는 순간까지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는 죄로 부패한 자들이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서 건지시고 한 나무인 십자가로 우리를 고치셨다. 우리는 패역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의 거룩한 교회로 삼으셨다. 교회라는 것이 이 건물,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다들 잘 아실테다. 교회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임이다. 우리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다. 참되신 삼위하나님을 함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자체가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이끄셨다. 교회를 지키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호의 날개 아래로 옮기셨다. 붙드시는 손 안으로 우리를 두셨다. 이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또한 감사한가?
여러분, 물론 우리의 인생길이 참 고되다. 광야와도 같은 험준한 인생길이라 하지 않던가. 잠시 잠깐 좋은 길, 평평한 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금방 고난의 상황들이 찾아온다. 어둡고 음침한 길을 걸어갈 때도 있고, 밤에 울부짖는 맹수들의 위협과, 추운 날씨를 견디면서 혹은 폭염 가운데에서 이 길을 가야 하는 때도 있다. 코로나와 같은 험한 상황들을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 말씀을 주신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신다.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삼위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동체를 향하여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강을 건널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도 함께 하시고 지키실 것이니 여호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교회의 거룩한 이요 우리의 구원자임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는가? 이 말씀을 굳게 붙들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렐루야! 마라에서 우리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게 하시며, 그분을 통하여 우리를 치료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주의 교회로 우리를 불러주시니 우리의 모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교회로 주의 몸된 교회요 그 아들의 거룩한 신부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들, 인생의 괴로운 상황, 힘겨운 상황에서 잠시 눈을 돌려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시길 바란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더욱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하늘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지친 광야인생이지만 지치고 괴로울 때마다 엘림을 만나게 하셔서 그 안에서 충분한 힘과 위로를 얻게 하사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넉넉하게 감당하게 하실 삼위하나님만 더욱 의지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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