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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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0 토요일 새벽기도회
찬송 : 516
본문 : 딤후1:9-14 (신p.343)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때 아무런 차이도 없고, 구별될만한 점도 없는 우리인데, 창세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독생하신 아들을 내어주시며, 성자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믿음으로 적용시켜 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고 영원히 붙들고 가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놀라우신 아버지의 사랑을 날마다 깨달으며, 그 사랑 가운데 잠잠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송축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소명을 주신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시길 원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말씀하셨으니 이 땅 가운데 부활하신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대로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참된 증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일을 위해 준비중인 비전 2022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셔서 지역교회로서 이 지역 가운데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밝히 전할 수 있도록 우리 교회를 들어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께서 말씀 가운데 함께 하셔서 친히 깨닫는 지혜를 부어주시고, 말씀붙들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만 하시고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원하시고 또 부르셨다는 말이다.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이 때의 부르심은 우리를 구원의 상태로 부르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받음과 동시에 우리가 이제 어떠한 모습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다는 말은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거룩하게 살도록 또한 부르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이어진다. 9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신 것이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라고 말씀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당연히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님을 누구나 아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신 것도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말씀하는가? ‘다만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은혜 때문’ 인데, 이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과 은혜이고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뜻과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내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거룩한 삶이 우리에게 고달픈 의무가 되지 않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우리가 받은 구원과 부르심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확신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구원이 번복되거나 취소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지되고 있는 것 역시 나의 신앙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열정과 행위로 받은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온갖 규정들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한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의 기쁨보다는 해야만 하는 당위성 때문에 매우 힘겹게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며 살아간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신 것은 오직 그분의 은혜이다. 그 은혜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해서 그 은혜의 힘으로 내가 거룩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적인 자유함이 있다. 이전에는 강박에 사로잡혀 나의 의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나의 일상이 진행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은혜가 나를 사로잡아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르게 만든다. 나는 그 은혜에 그저 반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 인정 받은 자녀로서 내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바로 이런 상태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신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신 상태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그의 일상을 한번 떠올려 보라. 그는 지독한 율법주의자로 살았다. 지독한 자기 열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가문과 학력과 스팩들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배워왔던 학문과 연구들을 통해, 그리고 그 율법들을 지킴으로서, 얻은 구원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빌3:6 의 말씀을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라고 이전의 자신을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율법을 지키는 열심 하나로 하나님께 인정받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오늘 본문 12절에서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내가 의탁한 것’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예금’ 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은행에 가서 내 돈을 예금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부분이 있다. 내가 은행에 가서 내가 노동으로 만들어낸 돈을 맡긴다. 예금한다. 본래 그 돈은 내 것이지만 은행이 예금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가 의탁한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이 표현은 원래 바울의 것이던 돈을 예수님께 맡겼다는 말이 아니다. 그 예금조차도 본래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내가 의탁한 것’ 이라는 부분을 ‘나에게 의탁된 것’ 이라고 번역을 해야 바울의 본래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이것들이 주어졌다고 해서 바울이 ‘나의 예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께서 바울에게 의탁하신 것, 주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그의 예금’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다. 이전에 지독한 율법주의로 살았던 자신을 단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바로 그 복음을 바울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전 같았다면 바울은 아마도 자신의 열심에 사로잡혀 자기 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음을 사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누가 십자가의 복음을 지키시리라고 말하는가? 12절 말미를 보시면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교회 역사상 바울 만큼이나 복음 사역에 열정적으로 임했던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주께서 지키신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는 신성모독한다고 여기던 그리스도인들을 싹 잡아 그들을 진멸하려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복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지만, 그 열정이 이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으로 승화되었다.
11절을 보시면 그는 의탁된 복음을 위해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바울을 복음을 위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자기 중심적인 열심에서 벗어났다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에 그런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또한 주신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본문 전체에서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9절의 고백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그분의 은혜요,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 말이다. 특별히 본문의 바울은 사도로서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헤로 가능하다고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진행되지만 거기에는 분명 큰 고난이 뒤따른다. 12절에서 바울의 말하는 바를 주목하라. 자신이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은 것 때문에 또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한다. 사도로서의 거룩한 삶이 은혜로 진행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에게 의탁된 것을 마지막 그 날까지 주께서 능히 지키실 줄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하여도,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면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때로 심한 모욕과 수치를 당해도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들을 기쁨으로 감내하지 않는가? 우리 주님께서도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서 심한 모욕과 수치와 고난과 죽음까지 당하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어 이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감내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날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고, 또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제대로 안다면, 그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 기뻐하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말이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셨다. 그것도 그분의 뜻과 은혜로서 말이다. 그 어느 부분도 우리의 행위대로 진행된 것이 없다. 우리의 어설픈 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과 복음에 기초한 우리의 신앙생활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바울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의탁된 것이 있다. 맡겨진 것이 있다. 바로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셔서 지역의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의탁된 복음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강남일교회로 모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거룩한 사명으로 부르셨기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능히 그 복음을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이 시간, 이 사실을 굳게 확신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또한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것에는 어떠한 우리의 자격이나 신분이나 공로가 들어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함이다. 특별히 우리를 이 지역에 두시고, 또 강남일교회를 만나게 하시며,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지체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음전파 사역이라는 거룩하신 소명을 감당할 때, 물론 은혜로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지만 분명 큰 어려움과 고난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모든 고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감내하셨음을 기억하라. 이제 우리도 그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도 고난과 시험들이 물론 있겠지만 그 사랑으로 인하여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기도하자. 그 무엇보다 주께서 이 복음을 능히 지키고 계심을 확신하며 충성되이 사명 잘 감당하는 우리 강남일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이 시간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