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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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베소서 1:15-19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받게 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은 단지 물질적인 복이나 현세적인 차원의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참된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자녀 삼아 주신 것,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참된 축복인 것이지요. 이것이 영적인 복이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복의 개념이 한 차원 더 넓어지고, 깊어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자 영적인 복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이 흘러넘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늘 찬송이 흘러넘칩니까? 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상황이 좋을 때는 찬송이 흘러나오지만, 상황이 어려울 때는 찬송보다 주님을 향해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늘 기쁨이 없고, 자신의 삶이 늘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누리게 되는 영적인 축복이 참된 축복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죄사함의 축복, 성령이 내주하시는 축복이 얼마나 가치있는 축복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영적인 축복보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더 가치있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리게 되는 ‘영적인 축복’‘참된 축복’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통찰력’을 지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뜨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통찰력’을 지닐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통찰력을 지닐 수 방법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7-18절 말씀입니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7절과 18절 말씀을 보면, 영적인 통찰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절에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시는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하나님을 알게 되고, 거룩한 진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18절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은 결코 사람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볼 수 있게 해주셔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 영적인 통찰력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이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의지적 열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자기 의로움만 커질 뿐,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 아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믿음 주셔야 믿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함으로 영적인 통찰력을 지니게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될 때,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의 소망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축복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함으로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지고,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며, 첫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로서, 군주시대를 여는 하나님의말씀 전달자 였습니다.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시대가 바뀌어 가는 길목을 지켜갔던 영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에도 이름이 오른 사사였고, 예언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가는 아주 혼란스러웠던 격변의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사사기 21자 25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이각기 자기의 소견에 옯은 대로 행하였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옳은 것을 행하는 시대” 였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하였다”는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기 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지독하게 일인칭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행패를부렸던 시대였습니다.
서로 함께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고 세워가는 세대가아니었습니다.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만 주장한다면 교만의 투쟁이 있을 뿐이며, 서로 죄를 이야기하면 겸손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신학자는말합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곳에는 분쟁과 다툼과 시기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는 오늘날 대한한국이 흑백논리와 진영논리라는 질병에 감염되어, 내것만 있는, 이기기만 하면된다는, 이기는 자가 역사를 쓴다는 논리에 마치 늪에 서서히 침몰하여가듯이 사회가 인격적으로 침몰하여 가는것과 흡사하였습니다.
사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라는 상태는 성경에서 아주 무서운 이교적 질병으로 등장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이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 “자의적 숭배” 즉, 자기 마음대로, 제 멋대로의예배하는 것을 이교도적인 행위로 경계합니다. 내가 보기에 합당하면 그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내로남불식행위이지요.
내 소견대로 : 밝아진 눈
왜, 성경은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를 나쁘게 생각할까요?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란 원문대로 번역하자면 “각자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를 말합니다. 우리의 “눈”(아인)이란 어떤 눈입니까? 성경에서 처음으로 “눈”이라는단어가 사용된 것은 창세기 3장 5절,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이 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눈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밝아진 내 눈으로” 옳다고 판단하는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내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겠다는 그것입니다. 타락의 기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가와 내가 보기에 어떤가?에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 (야샤르, יָשָׁר)에 대한 판단 기준도 달라 집니다. “옳은 것”으로 번역된 야샤르는출애굽기 15장 26절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야샤르, 옳은 것)를 행하라.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여호와이니라.”
문맥적으로 볼 때, “옳은 것”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분이 보시고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따라서 내 눈에 옳고 그른 것은 결단코 성경이 제공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옳은 것을 결정하실 수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세상에 태어났던 시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으로 대접을 받는 시대가아니라, “각자 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이 옳은 것으로 작용했던 시대였습니다.내 눈에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 내 눈에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나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옵시고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주시옵소서. 육신의 나약하고 아픈자들을 기억하옵시고 주의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주시고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대흥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철저한 이기주의와 자기주의에 도취된 시대에 갑자기 한 여인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한나”로, “풍성한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일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주변과 세상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적어도이것은 아니다. 이대로는 아니다. 더 이상 고통과 아픔 가운데 살아갈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 이상인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녀는 특단의 행동을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일어났습니다. 1장 9절에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괴로워서 기도하고통곡합니다.” 아마도 사무엘상 1장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일어나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히브리어로 “쿰”(קוּם)이라는 용어인데, 1장에서 두번 사용되었습니다. 또 한 곳은 23절에 나옵니다. “오직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것 역시 쿰입니다. 여호와계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 약속을 세우시는 것도 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울 때에도 “쿰 동사를사용합니다(창9:9,11).
그렇습니다. 사무엘을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1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입은 여인 한나여! 일어나라! 쿰하라! 이미 하나님께서 너와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너와 쿰 하셨다.는 그런 강한 말씀의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난과 고통, 핍박과 차별 가운데서 그래도 인내하며 살아왔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일어나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핍박과 차별, 고통 가운데서 ‘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불씨를 살리는 것입니다.
시편 20편 7-8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쿰, קוּם) 바로 서도다 세상 사람들은 병거와 말, 힘과 돈을 의지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자랑하며 언약 백성으로서 항상 ‘쿰’하면서,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을‘증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더욱이 한나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은 항상 ‘여호와’(야훼)입니다. 실로, 사무엘상 1장에서는하나님을 표현할 때 여호와라는 용어만 사용합니다. 딱 한번 17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엘로힘)을사용합니다.
한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 속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인격적인 하나님, 그래서 사람과 약속하고 언약을 세우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여호와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1장과 다르게, 창세기 2장에 아주 상세하게 다정하게 창조 사역을 펄쳐 가시는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피조물들의 이름을 정하게 하셨던, 피조물을 믿어주셨던 여호와 입니다.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왔습니다. 이제 자신의 삶의 아픔들을 토해내었습니다.
한나의 마음과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한나의 모습을 보고 14절을 보시면 “술에 취하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한나는 15절에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 뿐이다.”라고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밝혀 놓습니다. 쏟아 붓다는뜻입니다. 한나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서, 자기 백성과 언약 맺기를 좋아하시는 “여호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쏟아 부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생명 사무엘을 얻습니다. 사무엘이란 이름이 가진 의미는 샤마 + 엘 : 하나님이 들어셨다. 또는“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다.” 등의 의미를 가지지만, 성경 저자의 해석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간구하였다.”(20절) 간구하여 얻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일어나서, 간구하십시오. 우리와 인격적으로 약속하고 언약 맺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시대를열어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 1장은 독자들에게 삶의 아픈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독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어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
한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시고 응답사셨던하나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주께서 아시오니 들어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기도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말씀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길이며 나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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