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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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종교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십니까? 보통 우리는 ‘기독교’라고 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그분의 자녀 됨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입술에만 멈춰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 가치가 없다고 야고보는 우리에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말뿐인 믿음은 없습니다.

[야고보 당시 실제상황: 가난한 서민들과 노예들]
야고보는 당시 교회 안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사례를 가지고 쉽게 설명해줍니다. 야고보 당시 교회에는 부자들과 중산층보다는 주로 가난한 서민들이나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었지만, 삶 속에서 제대로 된 옷 한 벌 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먹는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생계를 유지하거나 꾸려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경건의 말뿐인 그리스도인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러한 상황 중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성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경건한 말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성경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사로써 하나님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축복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축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위해 아무런 조치나 행동 없이 말만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옷을 벗고 있었을까요? 배부르게 하는 방법을 몰라 굶고 있었을까요? 단지 말만 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아무리 남편과 아들을 잃고 과부가 된 나오미와 룻을 축복하고 환영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빈궁과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축복의 말은 시끄러운 소음일 뿐입니다.
[예화: 기도할게]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는 금요기도회 때나 주일 오후 모임 후 서로 나눔을 합니다. 한 주 동안 여러 가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죠. 보통 나눔을 할 때, 사람들은 좋은 일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고민거리들을 더 많이 털어놓습니다. 왜냐하면 고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또한 누군가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교회 나눔은 단지 ‘기도할게’라는 통상적인 말만 한 후 모임을 마칩니다. 이는 앞서 야고보가 말한 경건의 말만 하고 끝이 난다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기독교 웹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도움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했죠.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편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그저 ‘기도할게’, ‘잘 될 거야’라는 말로만의 위로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가 결국 그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소결론]
만약 우리 안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고백하는 지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함께 고민하며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함께 그 일을 해결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를 위하여 내려가 도와준 것처럼, 단지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으로 유익을 줄 수 있는 형제, 자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 선택이 아니다-> 성화는 구원의 결과]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통해 계속해서 행함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보다는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며 더 권위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소요리문답을 통해 칭의에 대하여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의는 어떻게 얻을 수가 있나요? 오직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믿음보다 행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성화의 부분입니다. 믿음은 칭의와 성화 모두 포함된 개념입니다. 결코 따로 분리하여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화는 구원의 여정 순서에 보면 칭의 다음으로 표기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칭의가 구원의 원인이라면, 성화는 구원의 결과입니다. 즉 믿음으로 인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생각하다 보니 이러한 의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행함이 중요한가?” 말입니다.
[양극단의 사람들(믿음과 행함)->믿음과 행함은 하나]
야고보는 18절에서 어떤 사람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이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행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둘 모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말씀합니다.
[결혼한 남녀]
이는 마치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결혼한 남녀와 같습니다. 서로 각자의 위치와 역할은 다르지만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증명하는 행함]
그래서 18절 하반절에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로 구성 된 믿음과 행함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보이다’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또한 ‘증명하다’, ‘입증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야고보가 믿고 고백하는 그 믿음을 증명하고 입증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소결론]
말뿐인 사랑은 남녀관계를 매우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헌신과 섬김으로 나타날 때, 그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이와 같이 입술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믿음과 행함: 아브라함과 라합

[귀신을 본받아: 고백과 행동의 일치]
야고보는 19절에 “하나님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에 신명기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방 신들과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것이죠.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어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조롱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았던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닌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귀신들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며 그 앞에 두려워 떨며 엎드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을 심판하고 멸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따라 두려워 떤 것입니다. 즉, 귀신들도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떨기까지 합니다. 귀신들의 믿음의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행함있는 믿음1: 아브라함]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야고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라합을 실례로 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위해 가장 강력한 근거로 구약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였습니다. 바울도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통해 증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야고보도 더 강력한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에 순종하여 바칠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립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이삭 번제 사건은 이 사건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칭의에 관한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삭 번제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증명되어지고 입증되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화에 관한 성격이 강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존재와 함께 공존하며 서로 함께 작동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온전함,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이끌어갑니다.
[구약에서 행함있는 믿음2: 라합]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생이었고 가나안 주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낸 하나님을 들었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여리고 성 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대접하였고 여리고 경비병들을 따돌려 평안히 가도록 하였습니다. 라합은 그 사실이 믿어지니 자신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그것은 우리 마음이 텅 빈 것과 같습니다. 또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폐기물과 같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전혀 본질적으로 다른 ‘우리의 생각’이며 ‘종교적 신념’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의 주해: 야고보서]
행함이란 믿음의 한 부분이며 성화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행함 또한 있어야 합니다. 함께 일하며 작동되어야 합니다. 루터는 이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오, 이 믿음은 살아 있고 쉬지 않고 활동하는 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이 선한 일을 끊임없이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믿음은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고,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그 선한 일을 해 버리며, 지속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이런 행함을 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불신자다.”
결론
[행함 있는 믿음 = 증명하는 믿음: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삶]
오늘 우리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있다면 그 믿음을 증명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입증하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세상 속에서 증명해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순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세상 속에서 증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순교를 권면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 당시 사회 속에서 드러난 행함 있는 믿음, 살아 숨 쉬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의를 행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사랑하고 섬기며 겸손함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내 몸이 편한 대로,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을 가진 자,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서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믿음이 믿음 되게 삶으로 고백하는 저와 우리 청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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