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삶 넘어서기

이사야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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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하고 지루한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Notes
Transcript

[서론]
여러분, 삶이 지루하지는 않으십니까?
삶이 항상 지지부진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먼저 점검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과 별로 관련이 없고, 항상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예배도 지루하고 설교를 들으면 항상 졸리기만 합니다.
내가 기도해도 잘 응답되지 않는 것 같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이런 증상들은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싫증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집 앞에 항상 누워있는 똥개 있잖아요?
주인이 지나가도 눈 한쪽만 뜨고는 다시 눈감는 그런 개 있잖아요.
딱 그런 모습인거죠.
그런데 이런 비슷한 일이 오늘 말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무료하고 지루한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우리가 오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몇 달전에 출애굽기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셨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목축생활이 아닌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이른비, 늦은비를 내려주셔서 농작물도 잘 자라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복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고 이뻐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주님이 탄생시킨 유일한 대표 브랜드였던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 세상에 샘플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시간이 좀 지나가 주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건 그냥 습관적인 행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면 다른 신들에게도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신들이 농사의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알려진 바알, 아세라 신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싫증’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린 것이죠.
연애할 때에도 싫증나기 시작한 게 헤어지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이잖아요.
그런 것 같은거죠.
그들은 예배를 그냥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었고, 자신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싫증나니까 다른 우상들에게 곁눈질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그들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이 예배는 드리지만 그 예배에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에게 싫증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23절에 보시면 주님은 “너희들이 언제 내게 양의 번제물을 바쳤고, 언제 그 제물로 나를 높였냐”며 묻습니다.
그들이 예배때 제물을 드리긴 했지만 주님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식어버린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예배들은 주님께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값비싼 제물을 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23절 보십시오.
주님은 그들에게 값비싼 예물을 받으려고 그들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으셨고, 값비싼 유향때문에 그들을 괴롭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드렸던 것은 주님을 정말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 더 값비싼 거 바치면 우리 소원을 좀 더 잘 들어주시겠지 하는 마음에 값비싼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런 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드린 것은 오히려 그들의 죄악들뿐이었습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단지 그 때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주님 안 믿는 사람들과 아무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만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지만 그들의 나라는 너무나 부패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 모두 타락했습니다.
도저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주님은 “너의 첫 조상부터 나에게 죄를 지었고, 너의 지도자들도 나를 반역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조상이었던 야곱때부터 그들은 주님께 죄를 지었었고, 그게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도 지도자들이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느 한 순간만 주님께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속적, 총체적 타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서 계속해서 경고하고 또 경고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경고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고, 눈이 있어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복과 성공, 승리만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만 들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제국에 멸망당하게 내버려 두셨고, 그 다음 남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 부분을 28절에서 말합니다.
여기서 ‘성소의 지도자들이 속되게 되었다’는 말은 ‘더럽혀졌다’는 말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들어와서 성전에 있는 거 다 약탈하고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주님의 성전이 더럽혀졌고, 지도자들이 더럽혀졌습니다.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이름인데 이스라엘의 옛 이름이 야곱입니다.
그들의 죄로인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철저히 멸망당했고, 결국 온 세상의 비방거리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경고를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분명히 그들은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가문에게 영원한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한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망했잖아요.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곧바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반성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배 빼먹지 않고 드리고, 제물도 비싼 거 바치고 그랬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며 한탄하고 원망했습니다.
당시 전쟁이란 신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혹시 하나님이 바벨론 신보다 약했나?’이런 의심도 했습니다.
실제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최고의 신 ‘마르둑’ 신전을 봤더니 너무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거에요.
그러니 그것보고 그들은 ‘아~이래서 우리가 졌나보다, 하나님은 무능하신 분인가’이렇게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약 70여년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합니다.
처음에는 원망과 한탄이 나왔겠지만 나중에는 왜 그들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 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인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죠.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50년이 지나도 전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안 보인거죠.
낙심이 찾아오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신앙생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시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5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기는 하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25절에서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신 것은 그들이 죄값을 다 치뤄서가 아니라 순전히 주님 이름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주님의 아들, 딸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건 결국 주님 자신을 욕먹이는 것이거든요.
자식이 욕을 먹으면 부모가 욕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주님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어마어마한 바벨론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실까요?
그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14-21절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신앙생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십니다.
뭐라고 하실까요?
19절 보십시오.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새 일, something new, 뭔가 새로운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새 일’이 뭘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해방자, 구원자가 바로 14절에 나오는 ‘속량자’라는 말입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노예 빚을 청산해줘서 해방시켜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값을 모두 스스로 치루시고, 그들을 바벨론에게서 다시 되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14절 후반절을 보시면 군대를 보내 바벨론을 치고 그들을 구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벨론은 막강한 군사력과 힘을 자랑하던 초 강대국이었습니다.
대영박물관에 가보면 바벨론 유물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크고 화려합니다.
바벨론이 당시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는 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화려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마차 몇 대가 지나갈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나게 튼튼하고 두꺼운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쳐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빼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시자, 이스라엘의 창조자시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15절 보십시오.
“나는 주, 너희의 거룩한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자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임지고 해방시켜주시고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까요?
새로운 출애굽 방식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전에 있었던 출애굽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이 출애굽사건이거든요.
16,17절입니다.
출애굽 당시 주님은 홍해 바다에 길을 내셨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자마자 뒤쫓아오던 이집트 군대를 그 바다에 완전히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너희들 내가 이렇게 한 거 기억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엄청난 일을 행할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바다가 갈라지고 그 곳을 통과했던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하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18절에 보시면 그 옛날 출애굽일은 기억하려고 하지 말고, 생각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짜 기억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 일어나면 그 기억은 빛을 바래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엄청난 일을 기대하고 소망하라는 말입니다.
19, 20절입니다.
전에는 홍해바다에 길을 내셨다면 이번에는 광야에 을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에을 내실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당진에 갈 때였습니다.
그때 서해대교를 건너가는데 그 다리가 정말 엄청나더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이걸 바다 한가운데 지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면 얼마나 큰 일이겠습니까?
과연 그 일이 일어났을까요?
실제로 70여년 후에 페르시아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줬습니다.
1,2,3차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거리는 무려 약 1,6000킬로 미터였고, 귀환한 사람들의 숫자는 1차에 약 5만여명, 2차는 남자만 1700여명이었고, 3차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 때 비행기, 기차도 없으니 그 수많은 사람들이 멀고먼 광야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밟은 곳이 곧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선두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방향으로 길을 만들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에 얼마나 배고프고 목이 말랐을까요?
주님은 그들을 위해 사막에 강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그들이 마른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있는 들짐승인 이리와 타조도 주님을 찬양할 정도였습니다.
동물들도 자기들 목을 축일 수 있으니 엄청 좋아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새 일을 행하시며 주님의 백성들이 자신을 찬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백성들의 존재이유가 바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며 그들은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결론]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새 일’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진짜 ‘새 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일’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원하셔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주신 일이 바로 복음, 좋은 소식입니다.
바벨론에서 자기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 물리적인 해방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해방은 죄에서의 자유함입니다.
영원한 영혼의 해방인 것입니다.
주님만나지 못한 인생은 어떻습니까?
광야와 같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 지못하고, 사막과 같이 항상 목마릅니다.
목표는 있는데 목적지는 모릅니다.
무엇인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제가 대학다닐 때 그랬습니다.
목표는 돈 많이 버는 것이었지만 그걸로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지를 모르니 많이 방황했습니다.
친구들과 엄청 술을 마셔보고, 밤새도록 게임도 해보고, 수없이 미팅을 해봐도 제 삶에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을 만나자 주님은 제 광야같은 인생에 을 내주셨습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존재목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행복이 오는 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방황목마름을 끝장내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싫증나는 신앙생활 끝내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났던 사람이라면 또다시 강렬한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합시다.
주님은 내 인생에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내 광야같은 인생에 대로를 내주시고, 사막같은 목마른 삶에 을 내주실 것입니다.
하루 빨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다카포 식구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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