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에게서 배우는 삶의 모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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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표기도

3. 성경봉독

John 1:35–42 NKRV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 설교

서론

겨자씨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설명해 주신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3:1-9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이고,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 비유
마태복음 13:44-50 세 가지 비유(밭에 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비유로 설명하신 이유: 비유의 기능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많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던 이유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마태복음 13:10-15 의 내용입니다.
Matthew 13:10–15 NKRV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는 마태복음 13:9 의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말씀을 압축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마태복음 13:31-32 의 내용으로,
Matthew 13:34–35 NKRV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것은 비유가 가지고 있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즉, 비유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쓰이는 반면,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해서도 쓰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설명하심으로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가지 비유, 두가지 설명 : 겨자씨를 이해하는 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들었던 비유 중 앞의 세개의 비유는 “씨"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비유만 설명해주시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즉, 세 가지 중 두 가지만 알면 된다라는 것이거나, 혹은 세 가지 중 두 가지만을 설명하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겨자씨 비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첫번째 네가지 밭에 뿌려진 씨앗 비유와 가라지 비유를 이해하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겨자씨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비유를 살펴보면, 네 가지 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뿌려지는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등장하는 비유인 가라지 비유에서 씨앗은 “사람"을 의미하고, 이 사람은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을 의미하고 밭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즉, 처음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을 들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고, 두번째 비유에서 씨앗은 네 가지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씨앗으로 쓰여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마음에 정착된 사람, 그러니까 좋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심기어 져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사람으로서 천국의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작고 여리고 부족하지만 그들이 세상에 심기어져서 자라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어떤 풀보다 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밭에 심겨진 씨앗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게 수많은 새들이 깃들어 열매를 먹고 씨앗을 배설하는 과정을 통해서 씨앗이 심기고 새로운 나무가 자라나게 되는 그 원리를 통해서 천국이 확장되어져 간다는 것을 세 가지 비유가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이죠.

본론

그리고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했던 그 “씨"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의 모습에서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구조

오늘 본문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35-36로 요한과 두 제자가 예수님을 보는 장면이고
둘째는, 37-39로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장면이며
셋째는, 40-42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요한의 두 제자가 다른 제자를 불러 모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핵심 키워드로 구조를 나누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고,
둘째는, 랍비여! 이며,
셋째는, 우리가 메시야를 보았다! 입니다.

본문 해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요한의 모습이 바로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했던 그 씨앗 비유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의 사람, 천국 아들들로 표현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함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보겠습니다.

35-36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것을 알았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에 자신의 제자들 중 두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서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왜 요한은 일부러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목에 섰을까요?
1) 35절을 개역개정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라고 말이죠.
하지만, 원문과 기타 다른 번역본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었다"라고 말이죠.
즉,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시는 모습을 보았던 그 곳에서 예수님이 또 다시금 그곳으로 오실 것을 확신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 앞 문맥에 의해서도 지지받습니다.
2) 앞 문맥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요한은 일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에 자신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일 뿐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메시야가 아님을 말했었고,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고백했으며,
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며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보며, 예수님이 참 메시야 이심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어린 양임을 알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자신의 뒤에 오실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해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전해왔던 것들,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의 사역은 끝이나고 자신의 할 일은 끝이 난다는 것을 가르쳐 왔던 그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이 지나가실 그 길에 다시금 서있었다라는 것이죠.
자신의 제자들이 진정한 메시야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말이죠.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 중 두 제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그 길 위에 다시금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스승의 생업을 책임지는 제자의 관계였고, 스승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제자의 수로 자신의 명성을 증명했고, 제자는 제자들을 많이 거느린 스승 밑에서 배운다는 그 자부심을 얻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업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이는 생업을 넘어 자신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쫓아 가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37-39

그렇게 요한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가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는 38-39 에서 예수님과 요한의 두 제자들 사이의 대답과 그들의 행동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에게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에서 머무르십니까?”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예수님은 그 두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에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머무르시는 곳에서 열시쯤까지 있었습니다. 즉, 늦은 시간까지 함께 대화하고, 식하사며, 교제하였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38-39이 보여주는 장면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구원자로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보다 더 격식있고, 권위가 있으며, 더 큰 가르침을 주실 “랍비"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37-39 뒤에 등장하는 40-42과 대립되는데,
37-39에서 요한의 두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랍비로 불렀던 반면, 예수님과 함께 늦은 시간까지 머물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고 난 후 인 40-42 에서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처음부터 메시야로서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구원자로 인정하여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가르침을 줄 스승인 랍비로서 따랐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서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0-42

그리고 40-42에 이르러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났던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안드레라는 것이 밝혀지며, 예수님을 만난자의 삶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확신과 기쁨에 찬 모습입니다.
41 에서 안드레는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생동감 있게, 속도가 매우 빠르게 전개되는 문장입니다.
즉, 안드레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자신의 형제 시몬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찾았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번역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로마에 함락당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이 혹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인가?하여 그에게 사람을 보내었고, 그에게 “니가 메시야인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당시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메시야를 갈망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수많은 자칭 메시야들이 활동했고,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적했다. 죽임당하고, 처참히 박살나는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오랜세월 시간이 흘렀기에 사람들은 이제 지쳐가는 시점에 있습니다.
저기서도 메시야, 여기서도 메시야 라고 많은 자칭 메시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아무런 구원도 이루지 못하고 그져 로마의 칼에 압제당하며 처참히 박살나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쳐가던 가운데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과 긴 시간을 보낸 후에 그는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이시구나!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해야할 그 모든 일보다도 먼저 자신의 형제를 찾아 그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고, 그런 그의 목소리는 떨릴 만큼 아주 설레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안드레가 확신하며,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42에서 기록하는 것처럼 게바라 하리라라는 인생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고, 인생의 목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면서 베드로의 인생은 바뀐다라는 것이죠.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며 말씀하셨던 그 말씀,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그 말씀이 바로 베드로의 인생을 바꾸었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어 주시며 베드로의 인생을 180 뒤집어 놓으셨다라는 것입니다.

결론

요한에게서 배우는 모습 : 좋은 씨

본문 적용

베드로의 이런 놀라운 변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바로, 요한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이 메시야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던 그 세례 요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을 쫒아가도록 내어주며 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생업을 포기했던 그 요한
John 3:30 NKRV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라는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욕심내는 삶이 아닌, 자신의 것을 비워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이 흥하여 지실 수 있도록 자신을 쇠하게 만들고, 자신을 가장 낮은 자로 여겼던 그 요한
이 요한의 씨앗이 심기었기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요한과 같이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실 것이요. 내가 낮아지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높아지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요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너는 쇠하여야 하겠고, 너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리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의 쇠하여져 감 속에서 드러나고, 내가 쇠하여져 가면 갈 수록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요한과 같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고백의 삶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내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작고 연약한 것이라도 그것은 모든 교회의 반석이 되었던 베드로와 같이 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이 땅 위에 강력하게 드러내는 기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5. 통성기도

들은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6. 마무리기도

7. 찬송가: 똑바로 보고 싶어요 다함께 찬송 하시겠습니다.

8. 기도회

코로나19 가운데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개인의 기도제목을 두고

9. 찬양: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10.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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