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사야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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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세상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안 믿어도 잘 살기만 하는데…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생각들은 2500여년 전 당시 이스라엘이 하던 생각들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바벨론에서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그 나라의 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에 이민간 1세대와 2,3세대는 많이 다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기원전 586년 멸망한 후 약 50여년의 세월이 많이 흘러 2,3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세대와는 또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바벨론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 문화가 편한 것입니다.
차츰 그곳의 우상들을 동경하기 시작했고,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태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게 뭔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본론1]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다보니 그들의 첫번째 문제는 신앙이 위선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에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있긴 한데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벨론의 문화에 순응하다보니 주님이 원하시는 진실과 공의가 삶에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1절 보십시오.
‘진실이나 공의라고는 전혀 없는 자들아’
진실과 공의가 뭔가요?
진실이란 거짓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진실된 삶이란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사회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된 삶이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공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올바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배때마다 입술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지만 그건 단지 종교적 고백일 뿐 자신들의 진심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부유하고 쾌락을 즐기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2절 보십시오.
“스스로 거룩한 성읍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아, 그의 이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자랑하는 자들아”
‘거룩한 성읍의 백성’,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이런 말은 그들이 예배드릴 때 하는 말들입니다.
그들은 예배때 이런 말을 하지만 그들의 삶은 이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의 찬양의 고백은 진실한 고백인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1절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곱의 집안’, ‘이스라엘’, ‘유다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이 명칭이 하나님과의 로맨스를 기억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라는 철천지 원수를 만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야곱은 살려달라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이‘야곱’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마치 부모님이 우리 어릴적 별명을 불러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어릴적 야곱이었을 때 뜨겁게 주님을 만났던 것을 회상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의 자손이 된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부족, 지파를 이루었습니다.
그 중 한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12지파는 모세,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고, 그 땅을 나눠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에서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땅 차지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의다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셔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유다지파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 때 일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야곱, 이스라엘, 유다 자손,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누군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빼고서는 역사 자체를 말할 수 없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진실과 공의’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과거 이름을 부르시며 그들이 누구인지 다시금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진실과 공의는 하나님 백성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이 너무나 고집이 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고집 세다고 말하나요?
아무리 말해도 말 안 듣는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집스럽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많이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이 거짓 안정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주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지적하시며, 계속 그렇게 살 때 멸망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수없이 경고한 그 일은 갑자기 이스라엘에게 닥쳤습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그 일을 한게 아니라 자신이 하신 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미리 예고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주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이 심판받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의 마르둑 신이 하나님보다 더 강해서 자신들이 비참하게 멸망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집스러운 존재로 표현하십니다.
그들의 목 힘줄이 쇠붙이같고 이마는 놋쇠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 힘줄이 쇠붙이 같으면 고개를 숙이지 못하잖아요.
그만큼 교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마가 놋쇠같다는 말은 뻔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말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얼굴을 철판깐 거 같이 죄를 짓고도 뻔뻔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밀어내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게 우리들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내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주님의 뜻은 살피지 않고 마냥 내 욕심을 놓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어려운 일 생기면 우리는 먼저 인간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다 해보고 안되면 그 때서야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뻔뻔한 지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런 소망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새 일이 무엇인가요?
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 일이란 주님이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전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에 보이는 화려한 신상들과 막강한 군대들은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것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나라가 고레스라는 왕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거대한 바벨론 제국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예고하신대로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이렇게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을 행하시기로 작정하셨을까요?
그들은 제대로 회개도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가능성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8절 보십시오.
성실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 반역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불성실하고 반역의 기질이 있는 것은 못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스라엘 편에서는 구원할 근거를 찾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근거를 찾으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은 이스라엘은 백성들을 돕지 않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본문2]
그런데 고레스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준 사건이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예고편이 뭔가요?
본편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맛보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고레스가 와서 이스라엘을 해방해봤자 일시적일 뿐입니다.
또다른 왕이 패권을 장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나중에 다시 그리스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할 것입니다.
8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항상 주님 앞에 성실하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반역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레스를 통해 하신 주님의 ‘새 일’이란 ‘맛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과 똑같은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삶이 평안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삶이 어려워지면 그때서야 하나님께 매달리는 게 우리들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차 뒤에 실고 다니는 스패어 타이어처럼 여깁니다.
내 삶이 빵구났다고 느낄 때만 그때만 주님을 찾는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불성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성실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새 일’의 본편은 정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가 이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는다니 어찌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친구한테 자기꺼 주는 것도 꺼려하는 사람이 많은데 주님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 천지에 어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죽을 수 있습니까?
심지어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위해 하나님이 대신 죽으신다니 이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우리들의 희생을 바라지, 그들이 절대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그 죽으셨던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승식형제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과 공의의 교차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렇다고 매번 반역하는 우리의 죄를 가만 두실 수는 없으십니다.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자신이 그 죄값을 치루는 것 뿐입니다.
어떤 나라에 의로운 왕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왕은 나라에 도둑질이 자주 일어나자 강력한 법 하나를 선포합니다.
도둑질하다가 걸리면 그 때는 강력한 매로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또다시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왕의 연로한 어머니였습니다.
왕은 고민 되었습니다.
연로한 어머니를 법대로 처벌했다가는 죽게 되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왕은 고심하다가 재판정에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어머니에게 법대로 태형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그대로 태형을 내린 후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어머니 위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신해서 그 태형을 맞았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새 일'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은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그 수많은 사람들을 두고 나를 주님의 자녀로 선택하셨나요? 한번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구원받은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만큼 신비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새 일은 우리가 구원받은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 ‘새 일’이 날마다 우리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형을 10년만에 만나게 된 일을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확률상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죠.
그런 희한한 일이 일상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기대합시다.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나한테 떡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그 주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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