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구원할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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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서론]
비행기를 타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불빛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불빛입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되었을까요?
십자가는 원래 로마에서 가장 혹독하고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형은 저주받은 사람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 전복을 꿈꾸던 정치범이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본보기로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형틀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축복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귀걸이, 목걸이로 차고 다니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 곳에 달려 죽은 한 사람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그 분을 뜨겁게 만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본론]
우리가 이사야서를 계속 읽어나가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이 행하실 ‘새 일’이란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키는 것인데, 고레스 말고 또다른 어떤 존재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호칭은 ‘주님의 종’인데 이사야에서 4차례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사야서는 4가지 종의 노래를 통해 점차 그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49장, 50장, 그리고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53장이 종의 노래의 마지막이자 클라이막스입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종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도 밝혔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곧 메시야,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500여년 전에 한 예언자는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53장은 ‘구약 성경의 에베레스트 산’으로 불리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가장 탁월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헨델의 메시야를 연말에 주로 공연하잖아요.
이사야서 53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찬양하실 때 이 구절을 노래하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면 좋겠습니다.
먼저 13절 보십시오.
그 종은 매사에 형통하여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형통이란 마침내 성공해서 높임을 받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1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방 나라 왕들조차 그가 행한 일을 보며 너무 놀라 입을 다물것입니다.
정말 지금까지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게 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그는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결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그의 모습은 더 안되어 보였고, 모습이 너무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습니다.
그냥 놀란 게 아니라 섬뜩하게 느낀 것입니다.
길거리 가다보면 간혹 병이나 사고로 인해 얼굴이 많이 일그러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몰래 몰래 쳐다보잖아요.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볼품없는 사람이었는 지는 53장 2절에 나와있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연한 순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한 순이라고 하면 예쁜 모습을 상상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는 그런 볼품없는 모습을 말합니다.
마른 땅에서 좋은 게 나올리가 없죠.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만한 좋은 외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님의 종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겉모습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외모가 내적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왕들이 다 장동건, 원빈처럼 묘사됩니다.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거나, 얼굴이 매우 잘 생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사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흉칙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가까이 있으면 그 저주가 자신들에게도 전이된다고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도 흉칙한 외모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져 사람들이 놀라고, 멀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절을 보세요.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병도 앓고 있을 정도로 매우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에게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어떤 매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3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들은 것’이란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메시야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종의 흉칙한 외모때문에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태어나실 때 방이 없어 헤매다가 누추하고 더러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출신은 나사렛으로서 다른 말로 하자면 시골깡촌 출신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였고, 그 역시 30살때까지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를 성경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리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출신, 배경, 외모 그 어느 것도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보일만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화려한 모습과 능력을 갖춘 용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그런 능력자를 원했습니다.
그 메시야가 자신들을 강대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고 과거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초라한 포장지때문에 그 속에 담긴 보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해 버립니다.
돈이나 지위, 정치 권력이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리라 믿습니다.
종교는 단지 연약한 자들이 믿는 거라 여기며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신뢰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또한 자신들의 기대에 맞는 메시야가 아니면 거부해버립니다.
예수님 믿으니 복 받았다, 성공했다,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아니면 그냥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분의 한계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죄악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 예수님을 오해하고 멸시했습니다.
예수님이 겪는 고난을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해 받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메시야가 자신들을 구원하는 방법도 자신들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고난, 고통, 슬픔은 모두 자신들의 죄악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의 대가를 메시야인 주님의 종이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우리의 허물과 악함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리고 상처를 받았다는 묘사는 정확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의미합니다.
악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단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자 반역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광야같은 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6절에서는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이 순한 동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연약할 뿐만 아니라 매우 고집이 센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동물농장을 보니까 양들이 어찌나 도망을 잘 가던지, 매번 잡으러 다니더라구요.
양들은 목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야생동물들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런데도 항상 자기 맘대로 가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그들은 야생동물들에게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양은 약한 동물이지만 이상하게 고집이 세고 어리석습니다.
또한 양은 시력이 매우 나빠서 바로 앞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바로 앞에 있는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양은 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양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각자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믿고, 자기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죄를 종에게 모두 짊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면 자신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 짐승 제물을 바칩니다.
짐승 위에 손을 얹어서 자기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메시야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구약의 제사제도는 메시야 예수의 예고편 같은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죄를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며 자신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이 바로 동물을 대신 잡아 자신의 죄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그 제물이 곧 죄를 지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제물=나 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로 바쳐져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죽은 짐승을 보며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 내 죄가 이렇게 죽을 만큼 심각한 것이구나.
그리고, 주님이 해결해주시지 않으면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하는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짐승 제사제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짐승을 죽이는 제사는 예고편이라서 본편이 나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 제사에 나온 어린 양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7절은 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종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사람들의 폭력에 종이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자신의 운명을 눈치채면서도 아무런 저항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듯 종도 자진해서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미리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붙잡혀 재판정에 끌려가서도 저항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을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10절은 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메시야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우리들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종이 자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종이 죽었는데 오래오래 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죽음이 결국 우리와 같은 많은 믿음의 자손들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어떻습니까?
500여년 전 이 복음이 선포되었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습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십자가를 너무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이렇게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장 7절입니다.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태초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지난 설교때 했던 말을 다시 합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올 줄 알았겠습니까?
어느 누가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인줄 알았겠습니까?
어느 누가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일이 우리를 향한 구원 계획인줄 알았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구멍난 배에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욕심에 취해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방황하며 길을 헤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분이 바로 메시야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