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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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1 views주님은 죄를 짓는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회개하는 자의 기도는 들으시고 구원해 주신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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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분명히 성경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왜 내 기도에는 응답이 없을까 궁금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확실한 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일까요?
[본론]
먼저 오늘 본문 구조를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1-8절까지 나오고,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 9-15절 전반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15절 후반절부터 21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 주님이 대답하시는 부분이 1-8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불평은 주님은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2가지 정도로 불평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실만한 그런 능력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으시는데 그럴 정도의 능력은 안되시기 때문에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주님이 내 기도를 아에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실 능력은 있으시지만 내 기도를 그냥 무시하시는 것입니다.
이 외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유배생활을 마치고 부푼 마음을 가지고 조상들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뭔가 정리가 안돼고 혼란스러운 모습 뿐이었습니다.
원래 남아있던 사람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주변 민족들의 위협도 여전했습니다.
성전을 세웠지만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향땅으로 돌아왔지만 어차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이게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인가?
이게 주님이 약속하신 새 일인가?
이런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해방되고 나서 사회 상황이 어땠는 지 생각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6.25사건이 터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절 보시면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시지 않는 이유가 주님의 손이 짧아서, 다시 말해서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시거나, 아니면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능력이 없으시거나 우리를 무시하거나 둘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이 반론을 하시는 내용이 1-8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주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이 각 종 죄악을 저질러서 주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제목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먼저 하나님을 원망할 게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 시편 66: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 마음 속에 죄를 품고 있었다면, 주는 내 소리를 듣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죄악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악이라고 말하면 종교적인 죄를 우선적으로 떠올립니다.
기도 많이 안 한것, 말씀 많이 안 본 것 이런 것들 때문에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하고, 더 말씀보며, 금식도 하면서 이런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주님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 받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죄를 우리가 지닌 질병이라고 본다면 그 죄의 증상들을 3절부터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죄라는 나무로 부터 맺는 죄의 열매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죄를 질병으로 설명하든지, 나무로 설명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절 보십시오.
손, 손가락, 입술, 혀 신체기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손은 남에게 폭력을 휘둘러 피로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악한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죄는 하나님 안 믿는 자들이 짓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짓는 죄입니다.
얼마나 당시 사회가 타락했던지 심지어 법정까지도 부패했습니다.
법정은 사회 정의를 바로잡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돼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법정이 타락하면 가장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힘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가 공정한가에 대해 여론조사한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도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법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는 사회라면 도덕이나 윤리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대권주자들의 정책 화두가 바로 ‘공정’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불공정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 엄마찬스, 아빠찬스 모두 불공정에 관련된 말들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시면
그들이 하는 일이란 죄악을 저지르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폭행만 있습니다.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는 데 빠르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신속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죄악으로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가는 길에는 황폐와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생각도, 손도, 발도, 모든 하는 일이 죄악을 저지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거의 숨쉬는 것조차 죄를 지는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죄인의 상태를 죄에 찌든 죄의 짱아치라고 부릅니다.
짱아치 아시죠?
완전히 염분이 흡수되어서 어디를 먹어도 짜잖아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가 이런 죄의 짱아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여러분이 동의하시든, 동의하시지 않든 만약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개선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까지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충분히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주님이 우릴 위해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로마서에서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이 공정한 사회를 이루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역사적으로 항상 실패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실패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끔찍한 인간의 실체를 보여줬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 보십시오.
마치 자신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것처럼 말하지만 뽑아주고나면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까?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좋은 왕을 기대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안전한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공평이 없습니다’.
‘스스로 길을 굽게 만들어 안전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길에는 공평이나 안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뭔가 공평하지 못한 것입니다.
코로나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지혜로 개발한 많은 기술들은 오히려 코로나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이상 인간의 과학기술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런 죄인들의 삶의 결과를 5,6절이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마치 독사의 알을 품고, 거미줄로 옷감을 짜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거미줄로 옷감을 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거미줄로 옷감을 짜면 그게 제대로 기능을 할까요?
거미줄을 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은 뭘 해도 자신에게는 무익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최근에 많은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중에 ‘모범택시’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사람들의 복수를 대행해주는 일을 주제로 하고 있다.
왜 복수를 대행해 주려고 할까?
법이 공평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수를 대행해준다고 해서 그게 속시원하기만 하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 공평한 정의일까요?
이렇듯 우리 사회의 공평과 공의는 우리 뜻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9절 보십시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며, 밝음을 바라나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우리는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담을 더듬고, 눈먼 사람처럼 더듬고 다닌다.
대낮에도 우리가 밤길을 걸을 때처럼 넘어지니, 몸이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래서 삶이나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없어 방황하며 헤매도록 만듭니다.
삶에는 견고함이나 안정성이 없어 항상 넘어지고 죽은 자처럼 삶에 생기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의 증상들입니다.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인류의 민낯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결 방법을 알 수 없으니 우리의 영혼이 울부짖는 것입니다.
11절 보십시오.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죄를 짓는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바울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며 슬퍼했습니다.
이렇게 죄는 우리를 고발합니다.
죄 짓고나면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12절부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같은 죄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런 죄 때문에 세상에 공평과 공의가 무너졌다고 고백합니다.
성실과 정직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져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이 망가지게 된 이유를 자신들의 죄악에서 찾고 있습니다.
회개란 이렇게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구원은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면 꼭 구해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졌는데 스스로 나올 능력이 있다면 구해줄 사람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진짜 죄인인줄 깨닫지 못합니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무엇이 위험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들어오면 그 때서야 무엇이 위험한지 알게 됩니다.
그렇듯 우리 영혼에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셔야 비로서 우리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기독교에서 죄인이라고 말하면 내가 왜 죄인인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법 위반한 적 별로 없고, 남에게 해를 끼친 적 거의 없는 거 같은데 왜 내가 죄인인가 인정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보는 순간 제 죄가 머리 속에서 필름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간 모든 순간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죄로 인해 슬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저의 경우처럼 주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괴로워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공의로 갑옷을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습니다.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시고,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용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탄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을 용감한 용사처럼 우리를 구출해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악이 심판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힘만 있으면 불법과 편법으로 살아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국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그들이 가진 모든 거짓 안정감들은 두려움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평하고 공정한 잣대로 그들은 심판하시고 우리는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는 잘 응답되지 않을까요?
설교 처음 우리가 물었던 질문입니다.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주님이 자신에게 무심하고 무능력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먼저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주님께 불평부터 하기보다 먼저 나의 모습을 살펴봐야 합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