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인생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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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views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셋째로,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Notes
Transcript
제목 : 성도의 인생여정
본문 : 창세기 39:1-6 (구약60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 깊이 연결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말라야 8000미터 고지를 넘나드는 산악인들은
늘 위험요소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언제 눈사태가 일어날는지 알 수 없고
고산병 때문에 뇌와 심폐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눈에 반사된 태양 빛이 너무 강해서
망막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크레바스>라고 합니다.
크레바스는 빙하나 눈 골짜기에 형성된 깊은 균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들판에 눈이 덮인 것 같아서
밟고 지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밟으면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함정과 같아서
크레바스에 빠지면 살아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번에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홍빈 대장도
크레바스에 빠져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히말라야를 등정할 때도 이처럼 위험요소가 많고
수많은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무작정 걸어가서는 안 되며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내야 할 원칙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9장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꼭 기억하며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손 아래 있다’ 는 말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요
누군가의 힘과 통제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의 괴롭힘을 당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우리도 살다보면
사람의 손아래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밤낮 일해도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정 폭력과 중독의 문제에 갇혀 버렸을 때,
관계 때문에 고통스럽고,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절망스러울 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 사고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때,
이 때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절망입니다.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혀 삶의 의욕이 사라지기도 하죠.
지금까지 의지했던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음이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요셉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의 손에서
이스마엘 상인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스마엘 노예상인이 누구입니까?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 이삭의 형, 이스마엘의 아들과 손자들입니다.
촌수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6촌 아저씨들에게 팔려 애굽까지 온 것입니다.
이후 요셉은 바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권력자 보디발의 손 아래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철저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운명에 갇혀 버린 것 같습니다.
누가 과연 요셉을 이 사람들의 손에서 빼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럴 때는
‘나중에 하나님이 높여 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거야’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높여 주실 필요 없고, 갚아 주실 필요 없으니까
나를 원래 상태대로 되돌려만 주세요!
여기서 벗어나게만 해 주시면 된다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이처럼 꼼짝 못하게 묶여 버렸을 때
패배감과 절망감, 우울과 무기력함에 허덕일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2절과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말이 아니라, 요셉의 주인 보디발의 말입니다.
억울하게 끌려온 노예는 무기력과 분노에 차 있기 마련인데
요셉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보디발이 볼 때도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그가 분노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평생을 원망하며 트라우마에 붙잡혀 살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요셉을 자유케 했습니까?
무엇이 요셉을 묶고 있던
여러 가지 상황과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내가 그 때 그 사람 때문에, 그 때 그 사건 때문에
이렇게 고통 당하고 있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한다면
오산입니다.
물론 그렇게 보여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겉으로 볼 때는 요셉이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손이 요셉을 붙들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요셉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의 손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그분의 영향력 아래 온전히 붙들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에 오셔서 몇 차례 말씀 전해 주셨던 마요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마 목사님은 탈북민이시고 현재는 서울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아버지가 45년 넘게 북한에서 공산당 간부로 당에 충성했고
마 목사님은 탈북하기 전에 역사 교사로써
김일성 주체사상과 당의 지도노선에 흔들림이 없던 분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탈북을 했는데
중국에서 선교사님들을 만나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수차례 통독하며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 목사님은 결국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한의 국가보위부에 넘겨졌습니다.
북한에서 보위부는 우리나라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단체입니다.
얼마나 그 권한이 막강한지,
어떠한 법적 절차 없이도 사람을 체포해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위부에게 넘겨져 북송이 되었고
보위부 중에서도 상급기관에 넘겨져서
혹독한 취조를 받으며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한 때는 ‘내게 고난을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목숨까지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신앙이 담대했는데,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시체처럼 걸어다니는 동료 죄수들을 보면서
저것이 1달 뒤 내 모습이다 생각하니,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자신을 선교사에게 연결해 준 사람이 원망스러웠다고 합니다.
원래는 1인 1실, 독방에 수감되어야 하는데
당시 정치범들이 많아서 2인 1실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도 철저하게 감시를 받습니다.
서로 절대 마주 볼 수 없고,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으며,
잘 때도 머리 방향을 반대로 두고 돌아 누워서 자야 했습니다.
우연히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수용소에서 볼 수 없는 얼굴이었거든요.
모두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회색빛 얼굴인데
이분의 얼굴에서는 환한 빛이 나오더랍니다.
사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얼굴빛이 아니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예수 믿는 분이셨습니다.
간수들의 시선을 피해 서로의 손바닥에다 십자가를 그어 주면서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갈 수 없다고 하는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할 때
더 이상 죽음의 공포가 목사님을 괴롭힐 수 없었고
더 이상 절망과 낙심이 목사님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집사님과 함께 하십니다.’ 라는 것이
약간의 위로가 될 뿐 그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어마 어마한 사건입니다.
어마 어마한 능력입니다.
그 자체로 충분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는 지금은
오히려 신앙이 무뎌지고 절실함이 많이 사라졌는데
마 목사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는
다름아닌 북한 보위부 수용소 안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에 눌려 있습니까?
어떤 감정과 오해, 그리고 어려움에 매여 있습니까?
‘그 사람과 상황만 벗어나면 괜찮겠지’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형통하게 하는 것,
우리 인생을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은혜의 한 복판에서 내가 깨어질 때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누가 이 고난 많은 세상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을 믿는 성도!
하나님의 손 아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그가 바로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둘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 다르다 할찌라도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 )
그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와야 문맥상 자연스러울까요? (잠깐 휴식)
아마도 좋은 주인을 만나 자유인이 되어,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형통한 것 아니었을까요?
주인 보디발이 여비까지 두둑히 챙겨 준다면 더더욱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천 천 히.......)
하나님이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지만
요셉은 자유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훌쩍 넘어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로서 인생 여정을 걸어갈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과 내 관점이 옳다고 하는
‘나 라고 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기 어렵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큰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최상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고
찾을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이처럼 큰데…
그것을 인간의 지혜에 맞추어 이해하려 하는 것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통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교묘히 죽인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치셔서
아이는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다윗은 이 아이를 위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금식하며 간구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7일 만에 죽습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도 그토록 슬퍼했는데
아이가 죽었으니 얼마나 더 낙심할까 하고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했다고 기록합니다.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저는 다윗이 거짓으로 슬퍼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윗이 인정머리 없는 매몰찬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아이가 죽은 이후에 어떻게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베풀어 평강을 부어 주십니다.
저는 나중에 천국에 올라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저의 여동생입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하교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마음보다는 망치로 뒷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듯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께서 찬양 가사 한 소절을
제 마음에 넣어 주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라 드넓은 저 바다도 온 세상 지으신 주님의 솜씨라
먹구름이 다가와 태양을 가려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솜씨라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 이런 멋있는 표현을 몰랐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찬양이 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데
이런 일이 나와 내 가족에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주관하고 계신다...
이런 믿음이 저의 마음을 감싸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니
더 이상 복잡한 감정이 저를 괴롭히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납득할 수도 없고, 마음의 요동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선하게 풀어가실 것을 받아들일 때,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평온히 붙들어 줍니다.
회복이 시작되며,
우리의 마음과 인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 있는지 다 모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괴로워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은혜가 임할 때
이전에 없었던 평강이 우리를 덮을 것입니다.
균형을 잃었던 우리의 인생이 제자리를 찾게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셋째로,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통 ‘사명’이라고 하면 위대한 과업이나 비전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고,
사도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셉을 통해
사명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일도 사명이지만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도 ‘사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을 사명으로 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위대한 것인가? 에 있다기 보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큰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사명이 아니라 야망이나 위대함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볼 때 아무리 보잘 것 없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노예로 살아가는 삶은 위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비천한 하루 하루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루 하루에 담아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살아갈 때
보디발은 몇 년동안 요셉을 지켜본 결과
그는 노예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면 노예지...
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찌라도 보디발 같은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을
노예의 손에 맡겨 관리하도록 맡기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노예에게 재산을 맡깁니까?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디발은
요셉을 자신의 가정 총무로 삼아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단지 보디발이 먹는 음식 빼고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먹거리)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술관원이지 않았습니까?
왕이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독이 있는지 여부를
느헤미야가 판단해서 왕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딴 마음을 먹었다가는
왕은 하루 아침에 독살 되었겠죠.
그만큼 주인의 음식을 담당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재산은 마음대로 관리하도록 했지만
그가 먹을 먹거리 만큼은 어느 정도 관여 했다는 것은
시간이 충분히 오래지 못해 느헤미야만큼의 신뢰관계는 안되었지만
적어도 요셉이 보디발의 재산을 관리해도 될만큼
자산 운용의 지혜와 행정 관리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노예는 원래 시키는 것만 합니다.
평생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일도 열정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보면 일하는 척하고, 주인이 없으면 요령 부리는 것이 노예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사명으로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면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간수가 죄수에게 죄수를 맡기는 일이 가능할까요?
죄수가 얼마나 인정 받으면 간수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까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면 하나님 원망, 자포자기 하면서
인생의 맥이 풀려버릴만도 한데
요셉은 감옥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의 사명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 중심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즈음 되었으니 이제는 편하게 이 삶을 누리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국정을 수행했습니다.
7년 풍년의 시기에 최선을 다해 7년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원수관계가 될 수도 있었던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여
풍족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리는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떠올리며
그의 인생의 위대함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요셉의 위대함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에 있지 않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할 것 없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오늘의 삶을 사명으로 감당하는 믿음!
그것이 요셉의 위대함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처해 있는 지긋지긋한 삶.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어떤 의미도 발견하기 힘든 삶.
사실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 때 그 사람, 그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고 있다며
원망하며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 여정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내가 맡겨주신 이 하루의 가치를
절대 내 생각대로 함부로 재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치 없게 여기는 오늘을 통해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하루를 사명으로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석을 캐내듯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단순한 오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위에 세워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은 절대로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를 낙담시키고 주저 앉히고도 남을 만한 큰 어려움과
마귀의 공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처럼 한 번 빠지면 끝장날 것처럼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람과 상황의 손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오늘을 사명으로 살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화면의 기도제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인생여정을 걸어갈 때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과 난관도 성도로서의 삶의 여정을 어긋나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오늘 내게 주신 이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내게 주신 사명임을 기억하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요셉을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오늘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 천국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붙잡아 넘어뜨리려 합니다.
성도의 인생여정 속에서 우리를 주저 앉혀 버릴 기세로
우리를 맞서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내 생각과 판단대로 나아갈 때
거기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사방으로 막혀 있고
그 사람과 그 사건 때문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막막함 가운데 있다할찌라도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겁박하는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주님의 손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상황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으로 우리의 불신앙과 불안함을 덮어 주옵소서!
균형을 잃었던 우리의 인생이 제자리를 찾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속에 심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루어가는 모든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최고의 예배를 드리며
물질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영의 모든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장에 나와 예배하는 성도들을 격려해 주시고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을 강하게 붙잡아 주셔서
우리의 예배가 온전히 살아나게 하시고
남은 성도의 인생여정을 승리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물질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기뻐받아 주시고
하늘의 은혜와 평광과 축복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