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 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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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생망’ 이라고요?
제목: ‘이생망’ 이라고요?
정말 인류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바이러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러다가 평생 마스크 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지 불안해 합니다.
혹시 해외여행은 다시 갈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이것뿐입니까?
이상기후로 더위는 더 심해지고, 산불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수와 지진도 자주 일어납니다.
나는 그렇다쳐도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어떤가요?
아무리 평생 열심히 일해도 내 집 한 채 마련하기가 힘듭니다.
연예인들은 빌딩팔아 수십억씩 남기는데 송파 세 모녀는 굶주림에 죽어갔습니다.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 범죄로 전화도 함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려 마음놓고 어디에 가지도 못합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과연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까요?
문제의 원인을 안다면 해결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죄’에서 찾습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을 성경은 메시야,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왔고, 또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새로운 세상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과연 예수님이 오셨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왔을까요?
앞서 말한 그런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오기는 커녕 세상이 더욱더 망가져가는 것처럼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2000여년 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여러 곳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여성을 포함한 소외된 자들의 인권은 많이 신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인권선언문을 보시면 근본정신이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 보건기구 깃발에 있는 뱀형상도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여기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하나의 성경적 표현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세상을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소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 이 땅에 부분적으로 왔지만 아직 완전하게 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퍼즐이 조각 조각 맞춰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맞춰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 오시기 약 500여년 전에 벌써 이사야서에서 마지막 때를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만큼 그들이 사는 삶의 형편이 힘들고 괴로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방민족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먹고 살기 힘들었고, 전염병도 창궐했습니다.
이 때 이러한 예언은 그들에게 큰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져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먼저 그 세상은 질적으로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지었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좋을까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겠죠?
여러분 혹시 리모델링과 재건축의 차이를 아시나요?
리모델링은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지만, 재건축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가 맞이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살던 세상과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의 특징을 알아볼까요?
첫번째, 새로운 세상은 슬픔이 없고, 기쁨만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18,19절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 슬픔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나요?
여기서 말하는 슬픔이란 뭔가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결핍을 느낄 때 발생하는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슬픔을 느끼고, 내 뜻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결핍이 없기 때문에 슬픔이 없고 기쁨과 행복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하고 고통을 겪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인해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인간은 한정된 자원 속에서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차지하면 자신은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쟁에서 진 사람은 가지지 못해 결핍과 불만족 상태가 되고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는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공급받기에 결핍이 없습니다.
우리끼리 하나 더 차지하려고 싸우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제 가족이 7명이라서 우리 집은 귤 한박스를 사면 그 날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매일마다 귤 한박스씩 사주실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우리 누나들, 여동생과 저는 어떻게든 재빠르게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 날 안 먹으면 다음 날은 없거든요.
이 세상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우리는 그 분의 무한하심에 접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접속해도 우리가 이 땅에 있는 한 자원은 여전히 한정돼 있지만 내 삶은 풍성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결혼 후 불행한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귈 때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욕도 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이런 남편으로 인해 딸 또한 우울증이 심해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절에도 가보고 108배도 해보고 갖은 노력을 해봤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추천으로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만난 후로도 여전히 삶은 어렵고 힘들지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 의지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지만 주님과 연결되자 주님의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그를 행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두번째, 새로운 세상은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는 세상입니다.
20,21절입니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백살’이라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성경의 완전수로서 장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에서는 이 땅에서 장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장수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당시 고대사회는 환경이 열악해서 태어나자 마자 죽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람의 평균수명도 매우 낮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이가 일찍 죽지 않는 것과 오랫동안 사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지금도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이 고통과 슬픔만 가득하다면 오래 사는 게 오히려 저주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기에 오래 사는게 축복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 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할지라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가 바로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증상이 바로 질병인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에 이상이 생기고 병들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건강하게 장수한다는 말은 죄가 극복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새로운 세상은 정직과 성실의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21,22절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갑과 을이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극심한 경쟁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 가지고, 없는 사람은 더욱 빼앗기는 세상입니다.
청년들은 집 걱정하고, 취업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은 공의로운 세상입니다.
자기가 땀흘린 만큼 얻는 세상입니다.
집이라는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자신이 짓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역시 먹고사는 터전인데 자신이 땀흘린 만큼 수확을 거둡니다.
집걱정, 취업걱정이 없는 세상입니다.
정직과 성실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세상인 것입니다.
네번째,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입니다.
25절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요즘 몰카때문에 낯선 곳에 머물기도 불안한 세상입니다.
묻지마 범죄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cctv가 달려있습니다.
온통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은 안전한 세상입니다.
이 구절의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리와 어린양이 어떻게 풀을 함께 뜯어먹습니까?
다 알다시피 이리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입니다.
그런데도 어린 양이 위협을 느끼지 않고 이리와 함께 풀을 뜯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사자와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뱀도 더이상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고 흙을 먹이로 삼고 살아갑니다.
평화롭고 안전한 새로운 세상을 동물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리나 사자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육식동물이 양을 먹고싶은 데 그것을 절제하는 게 아니라 아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가 이정도니까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안에 남을 해치거나 공격할 마음 자체가 전혀 없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밤에 혼자 어디든 돌아다녀도 안전한 세상입니다.
이사야서 11장에는 더 극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11:8절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면 “젖먹이가 독사의 구멍 앞에서 장난치고, 어린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얼마나 안전하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에이, 이건 그냥 좋은 세상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엄마뱃속에서 자신이 나올 세상을 알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사야서 11:9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그들을 해치는 것이나 다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너무나 친밀히 알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백성이 부르기도 전에 응답해주시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과 너무 친밀해져서 주님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통치가 이뤄지면 그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헬조선, 이생망 모두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말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에 보면 ‘의심의 성에 사는 절망거인’이 등장합니다.
그 절망거인의 아내가 자포자기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 바로 절망이란 것을 알기에 그는 주인공 크리스천을 감옥에 가둬서 절망하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크리스천이 잊어먹고 있었던 열쇠 하나를 가슴에서 꺼냈습니다.
그 열쇠는 절망거인이 가둔 감옥을 열수 있는 열쇠였습니다.
그 열쇠의 이름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이란 소망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약속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1500명의 유대인이 잡혀왔는데 그는 그중 1200명이 하룻밤 사이에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이들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자신도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빅터 프랭클은 끝까지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제노동 시간에 땅에서 주은 유리조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깔끔하게 면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급되지 않는 식수를 아껴 매일마다 세수를 했습니다.
그는 삶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기 위해 그의 모습을 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그의 모습때문에 가스실로 보내는 것을 결정하던 군의관은 그를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군의관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수용소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 무시무시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그를 견디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소망’입니다.
모두다 절망할 때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 삶이 아직도 안 풀리는 것처럼 생각될 때 소망을 품읍시다.
야구의 회차를 우리의 인생으로 비유한다면 아직 여러분은 1회말, 2회초에 불과합니다.
저는 4회초가 되겠네요.
지금 삼진 아웃 당했다고 생각되도 아직 기회는 많습니다.
심지어 9회말 2아웃, 투쓰리 풀카운트일지라도 아직 한 방이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