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 11장 : '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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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1 - 우리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설명) 중고등부 예배에 오신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신앙고백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시 1장부터 10장까지 복습 들어가겠습니다.
1장은 성경에 대해서 말합니다. 2장은 이 성경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되신 삼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장은 이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작정이라고 합니다. 이 작정에 대해 설명한 것이 4장 창조 5장 섭리입니다. 창조는 만드는 거고 섭리는 유지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잘 만들어놨는데 무슨 일이 생깁니까? 6장에 설명합니다. 타락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요. 타락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 세상에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7장은 언약에 대해 말합니다. 이 언약을 중개하는 중보자가 있습니다. 8장은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중보자에게 나아가는 건 강제로 나아가는 건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통해 나아갑니다. 9장은 자유의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의지는 타락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10장 효력 있는 부르심, 하나님께서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살펴볼 12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난 뒤에 우리를 의롭게 칭하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의롭게 칭한다.’, ‘의롭게 부른다.’ 이걸 한 단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우리 개신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 십자가를 근거로 의롭다고 해주시는 거예요. 칭의가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타락한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와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데 타락한 사람이 죄 없으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없다고 선포하시는 거예요. 의롭다고 하시는 거예요.
칭의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롭다고 해준다는 뜻이잖아요? 우리가 만약 의롭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의로운데 뭘 굳이 의롭다고 칭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의롭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거예요. 칭의는 우리가 원래 타락한 존재라는 걸 근거하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의롭기 때문에 칭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칭의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칭의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칭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칭의는 누구의 일입니까?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 주는 건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겨냥해서 의롭다고 해주시는 거예요. 칭의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칭의의 대상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죄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의롭지 않은 사람이 우리에게 의롭다고 한다면 그건 근거없는 말이 될 거예요.
자 정리를 하자면 칭의는 타락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선포라는 거예요. 이 칭의는 로마 카톨릭하고 비교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차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를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로마 카톨릭은 칭의를 믿지 않아요. 로마카톨릭은 의화를 믿습니다. 의화는 그냥 의롭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의롭게 됩니까? 우리 하는 행동을 보세요. 의로운지 아닌지 금방 답이 나올 거예요.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사람에게 주입된다고 믿습니다. 언제 그렇게 되냐면 자기들이 세례 받을 때 의로움이 풀로 충전된다고 믿어요. 이 의로움을 통해 공로를 쌓습니다. 제가 예전에 설교한 일곱가지 대죄있죠? 그런 대죄를 지으면 이 의로움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의로움이 사라지면 공로를 쌓지 못하니까 지옥가야 합니다. 어쨌든 카톨릭은 주입된 의로움을 기반으로 해서 공로를 쌓아야 천국 갑니다.
근데 로마 카톨릭 신자도 살면서 죄를 짓겠죠? 그러면 이 공로가 깎여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부한테 무슨 죄 지었는지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면 숙제를 내줍니다. 찬송 몇 번 부르고 기도를 어떻게 어떻게 해라 이런 숙제를 내줘요. 이 숙제를 로마 카톨릭에서는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을 통해 잃어버린 공로를 다시 쌓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내린 숙제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구원 받기에 공로가 충분하지 않으면 연옥에 들어가서 다시 공로를 쌓아가지고 천국에 올라가야 합니다. 연옥에서 바로 천국에 올라가고 싶어서 만든 게 중세시대에 카톨릭이 고안한 면죄부입니다. 개신교 전통은 이 면죄부를 반대하는 거예요.
카톨릭의 구원은 의화가 되고 계속 공로를 쌓고 죽어서도 공로를 쌓는 거예요. 천국 갈 때까지요. 자기한테 주입된 의로움을 통해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게 카톨릭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의화를 믿지 않습니다. 칭의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해결하시고 예수님의 의로움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카톨릭의 의로움은 하나님한테 주입 받은 후에 자기 안에 있는 의로움이에요. 우리의 의로움은 주입 받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에요. 우리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로워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세요. 우리의 의로움은 주입이 아니라 전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의화가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톨릭 신자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들한테 주입이 되고 우리는 그냥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거니까 우리가 뭔가 더 못해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칭의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 성화라는 사건도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칭의는 의화보다 훨씬 더 멋진 사건입니다. 의화는 세례 받을 때 의로움이 한 번 주입되고 나머지는 계속 쌩고생해야 합니다. 죽고 나서도 천국에 바로 못 갑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카톨릭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으니까 성경을 이상하게 이해하게 되고 사실이 아닌 걸 믿는 거예요. 그리고 고생하는 거예요.
본론2 - 칭의의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셨는데 이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죗값을 다 치르셨어요. 예수님이 죗 값을 치르셨는데 하나님은 그걸 우리가 죗 값을 치른 것처럼 인정해주셨습니다. 이걸 두고 속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속상은 값을 지불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속상’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의로움이 나에게 덮어졌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해주는 수단이 뭐냐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속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이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이 믿음은 우리의 행동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어떤 신념이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굉장하죠. 이 믿음 때문에 2천 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의 효력이 시간을 뚫고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이 믿음은 우리가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의로움을 우리가 입는 거예요. 이 믿음은 돈으로도 못 사고 똑똑하다고 깨닫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 능력이 아니라 주는 사람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거잖아요? 우리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롭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본론3 - 칭의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어요.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여김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잖아요?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계속해서 의롭다고 인정 받기 때문이에요. 신앙고백서에서 칭의에 상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겠어요? 이럴 수 있죠? 내가 죄 지어도 “나는 뭐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제 친구가 예수님 믿는 저를 놀리고 싶어서 “야 광준아! 사람 푹 쑤시고 나 예수님 믿어요 하면 천국 가냐?” 저는 당시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적이 없어서 한 번 웃고 한 대 때리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질문은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이고 한국 교회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신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을 일으킨 주제예요. 그 논쟁을 다 언급할 수 없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의롭다고 여김 받은 사람들이 왜 이 이 지경으로 사냐?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예수님만 믿으면 계속 의롭다고 여김 받으니까 저렇게 사는 거 아니냐? 이거 칭의라는 교리가 잘못된 거 아니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 같아요. 하지만 신앙고백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이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를 끝까지 안 읽어서 그래요.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니까 그런 거예요. 5항에 무슨 말이 있냐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부성적 분노를 당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칭의가 취소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의인들에게 분노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무슨 말이 있냐면 회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얼굴빛은 회복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교제입니다. 아무리 의인으로 여김 받은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칭의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기억해야 한다는 건 우리가 칭의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칭의는 천국행 티켓 역할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칭의는 법적인 거예요. 내가 죄인이고 죗 값을 내가 치러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예수님이 죗값을 치러주셨어요. 하나님이 그걸 근거로 나를 의롭게 여겨주셨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의롭게 살아야 되겠죠?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여겨주셨는데 그게 너무 감사해서라도 의롭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의로운 존재로, 정의로운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까지 알아야 칭의를 제대로 파악한 거예요. 의롭게 여김 받은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결론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서 우리의 죗값을 치러주시고 예수님의 의로움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이걸 의롭게 여겨주신다고 해서 칭의라고 합니다. 이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입증할 수 있고 믿음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칭의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 의롭다고 여겨주실 때 우리가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기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된 우리에게 분노하십니다. 이번 한 주도 내가 의롭다 여김 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