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6새벽]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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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20 나의 죄를 정케 하사
본문 눅5:1-11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의 거룩하신 교회의 지체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종들이지만 영광스러우신 주의 몸인 교회를 섬기도록 허락하심에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능력도 없고, 기술도 없으며, 자질도 부족하고, 물질도 부족합니다. 온통 부족한 것 투성이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불러주시고, 또한 주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며 세워가도록 우리를 불러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고, 우리를 교회의 구석구석 섬길 수 있도록 세워주신 분도 주님이시기에 또한 감당할 만한 힘과 능력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곳에 제대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능력의 장중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1:35 이후의 의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야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지만, 요한복음에서 그 사건을 생략하고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있었던 한 사건, 즉 유대 지역에서 일어났었던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두 제자간의 첫 대면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만났고, 요1:37 마지막 부분에 '예수를 따르거늘'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까지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 안드레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굳이 안드레만 언급하는 이유는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이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드레를 소개할 때에도 그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사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이 되었고, 이미 모든 성도들이 베드로 라는 인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 때부터 베드로와 안드레가 즉각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난 그 감격이 얼마나 황홀하고 대단했었는지 즉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까지 하였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의 감격과 결단을 잃어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던 것이다.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본문의 말씀인 눅5:1-11 을 보라.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며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비롯한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다. 그물을 씻는 것은 물고기를 잡은 후에 하는 일이었다. 그물을 사용하고나서 묻은 바닷물의 소금기를 깨끗한 물로 행궈내야 그물을 오래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일부로 그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그곳으로 찾아가신다.
당시 이미 예수님 곁에는 그분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있었고,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물을 정리하던 시몬의 배에 오르시고 시몬을 시켜서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로 배를 띄우게 하신 후, 바로 그 배 위에서 말씀을 듣고자 모여있는 무리들에게 말씀으로 교훈하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명하신다. 이 때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선생님, 우리들이 밤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좀전에 빈 그물을 씼던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베드로와 안드레는 물고기를 잡는 일에서만큼은 베테랑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면이 바다라고는 하지만 아무때나 바다로 나간다고 원하는 물고기를 낚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저는 낚시를 잘 모르지만, 어종마다 잡는 철이 있고, 그게 수온에 따라 또 달라지고, 바다 깊이에 따라 또 달라지며,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잘 잡히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한다.
아마도 베드로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평생 이 일로 먹고 살아왔으니 갈릴리 호수의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전날은 이상하리만큼 물고기가 잡히질 않았다. 배를 띄우고 그물을 내리며 그간 익숙했던 구간들을 돌았다. 그러나 물고기 하나 잡은게 없다. 허탕도 이런 허탕이 없다. 그래서 패배자처럼 의기소침하여 배에서 내려 정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은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딱 봐도 바닷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고, 또 나름 베테랑이던 자신들조차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물고기 구경조차 못해봤던 곳에 다시 가라 하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미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하고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생님 말씀 때문에라도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그물을 행구는 일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무거운 그물을 들어올려서 바다 소금기를 행궈내야 했으니 손도 많이 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 다시 허탕을 치게 된다면 그 수고를 한번 더 해야 한다.
베드로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만약 그에게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님을 떠나 다시 어부의 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수님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선지자 정도로 여겼을수도 있겠다. 좀 나쁘게 생각하면, ‘어부의 일에 대해 당신이 알면 나보다 많이 알까. 사람들 앞에서 망신한번 당해보겠소?’ 하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물을 내리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름 베테랑이던 자신들이 밤이 새도록 하나도 잡지 못하던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혀서 다른 배에 나누어 실을 정도로, 그것도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사건만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이 이후에 예수님께서 어부 중에서 네 사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10절 중반부를 보시면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실 누가복음의 이 말씀 보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할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되게 하다' 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포이에오' 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바라'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다. 창1:1 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 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창조'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창조경제’ 라거나, ‘창조적이다' 라는 표현도 있겠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창조' 라는 단어, 특별히 구약에서 창조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바라' 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던 단어였다. 그리고 이 단어가 예수님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4명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구약적 배경으로 의역을 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창조하겠다' 라는 것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 저들을 이러한 존재로 새롭게 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부르심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만큼의 지식이 있고, 얼마만큼의 재력이 있는지 등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인가? 예수님께서 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새롭게 만드시겠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내가 너를 이런 목적으로 새창조 하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주께서 우리를 이와 같은 존재로 새롭게 빚으시겠다고 하신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예수님의 강력한 부르심, 누구도 막지 못할 부르심을 받은 후 그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인 눅5:11 을 보면,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라고 말씀한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어부였다. 배와 그물은 그들이 가진 전재산과 같았고, 갈릴리 호수는 그들의 생계를 위한 일터였다. 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뒷전으로 할만큼 진정한 가치이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 말로 가방끈이 짧은 그들이었다. 어부라보니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약자였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이왕이면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힘도 강하고, 명성도 있는, 소위 다 가진 자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그들은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들, 곧 나에게 가진 것이 거의 없더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인가? 온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주님께서 나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자 하신다면 주님의 뜻대로 나를 새롭게 세우실 것을 그들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이나 부족한 지식이나 부족한 자질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마른 뼈와 같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그렇게 변화시키시며,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새롭게 창조하셔서 사용하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결론이다. 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또한 교회 내에서 여러 봉사의 자리를 감당하며, 때로는 나의 결핍들이 쉽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여러 현실적 어려움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럴 때에 연약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 우리에게 없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을 채워주시고 감당할 만한 힘을 더하여 주시는 선한 원천이 되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신대도 불구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들만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곤 한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사역과 섬김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바라보라.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연약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이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목표를 주시고, 그 목표 붙들고 감당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바로 그 자리에 세우셨음을 기억하라.
교회를 섬기는 직분의 자리로 부르시고, 또한 맡기신 영혼들을 세우는 부모의 위치, 교사의 자리로 세우시고, 또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돌보고 섬길 수 있는 임원의 자리로 부르신 분이 바로 우리 능력의 주님이시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능력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연약함이나 부족함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란다.
코로나가 제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 있을 뿐이다. 세상 모진 풍파들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 한마디면 잠잠해진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며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의 몸된 교회를 힘있게 세워가시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한다.
주님의 부르심 따라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길
시작되는 교육부서 여름사역들을 위해
담임목사님을 비롯하여 세우신 말씀봉사자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