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왜 고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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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엊그제 제가 섬기던 교회를 다니던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주려고 제게 왔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결혼에 대해서 여러가지 조언을 해줬습니다.
결혼에 대한 많은 환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해줬습니다.
여러분 결혼이 뭘까요?
결혼은 광야훈련학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만 하면 연애때보다 더 행복하고 좋을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는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견뎌내며 27년을 살았고, 40도가 넘는 사막에서 강제노동도 견뎌냈습니다.
그는 지옥같은 오랜 세월들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6개월만에 아내와 이혼을 했습니다.
(웃음) 그만큼 결혼이 감옥보다 더 견뎌내기 힘든 훈련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매우 끈끈해 집니다.
저같은 경우도 아내와 힘겨웠던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내와 함께 이겨낼 수 있었기에 지금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굳건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에게도 광야생활이 바로 그런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본론 배경설명]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를 뽑으라고 묻는다면 아마 모두들 출애굽 사건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자신들을 해방시켜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기적적으로 홍해에 길을 내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물 속에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으면 한 일주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약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10절 설명]
그래서 10절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여기서 은을 불에 달구면 불순물을 없애고 순수한 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진실하고 굳건해지도록 그들을 광야에서 시험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나안 땅 들어가기 전에 광야훈련학교에 입학시키신 것입니다.
군입대하면 자대배치를 바로 받는 게 아니라 훈련소부터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이런 시험을 주셨을까요?
이집트에 400여년간 살면서 그들이 물들었던 노예 근성들을 바꾸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오랜 세월 몸에 배어버린 사고방식, 생활방식들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40여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훈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증명]
미국에서 사는 한인 2세, 3세들 보면 어떤가요?
완전히 미국인이잖아요.
사고방식, 생활방식 모두 아메리칸 스타일입니다.
하물며 400년을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았다면 어떨까요?
찌든 노예근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가지 시험들과 고난들을 통해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적용]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요?
예수님 믿는다고 우리 삶이 곧바로 변하나요?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교육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깊숙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한 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 죄의 노예근성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나서도 계속해서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단련하시는 최고의 훈련법은 삶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냥 불평하며 지낼 것이냐, 아니면 고난을 주님의 시험으로 여기고 기쁘게 인내할 것이냐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봤던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처럼 고난은 내 안의 불순물을 없애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과정인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몸도 마음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진실해지고, 단단해 지는 것입니다.
많이 두드린 가죽이 최상급 가죽이 되는 법입니다.
많은 파도를 겪어낸 조개에서 값진 진주가 나오는 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 믿으면 고난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생끝, 축복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고나면 그때부터 광야훈련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 믿기 전에도 고난이 있었는데 예수님 믿고나서도 고난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라고 물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게 달라지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설명]
그럼 과연 이스라엘은 어떤 시험들을 겪었을까요?
광야훈련학교에도 정말 힘든 시험과목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빡센 훈련이 무엇이었는 지 11,12절에서 소개합니다.
먼저 주님은 그들이 그물에 걸리게 하셔서 무거운 짐을 등에 지우셨습니다.
그물에 걸렸다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들에 에워싸여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말합니다.
‘무거운 짐’이란 삶에 압박을 가하는 일들을 의미합니다.
걱정, 근심으로 나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내가 가진 믿음의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면 광야에서 그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의 문제를 겪었습니다.
중동의 광야는 거의 사막이라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서 대번에 나온 불평이 뭐였는 지 아십니까?
바로 과거에 자신들이 노예생활을 했던 이집트에 있을때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면 좋겠다며 불평했습니다.
이게 그들이 가진 믿음의 밑천이었습니다.
또 12절을 보면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가 짓밟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져서 원수들의 발에 밟히는 그런 패배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경험은 마치 ‘물’과 ‘불’을 통과하는 그런 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물과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위협을 말합니다.
이런 패배의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경험인가요?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일조차도 겪게 하셔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증명]
그럼 왜 주님은 가볍게 시험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힘든 시험들을 주셨을까요?
주님이 이렇게 빡센 훈련을 시키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운동을 해보니까 턱걸이 5개씩 매일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턱걸이는 하나씩 하나씩 늘려가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개 더 늘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모릅니다.
달리기도 다섯바퀴 돌다가 여섯바퀴 일곱바퀴 점점 늘려가야 합니다.
그럴 때 몸에 근육이 붙고 근력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적용]
믿음에도 근력이 있습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주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가 믿음의 근력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가진 근력보다 조금 더 센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면 견디기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내 믿음의 근력보다 조금 더 높은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견뎌내면 내 믿음의 근력이 더 강해지는 법입니다.
고난이란 이겨내면 축복이지만 넘어지고 실패하면 고통만 남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하나님의 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을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것이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입고있는 옷을 벗겨보면 그 안에는 밝게 빛나는 옷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내가 가진 믿음때문에, 내가 가진 성경적 가치관때문에 때로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시험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셨습니다.
실패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설명]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13절입니다.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여기서 ‘주의 집’이란 성전을 의미합니다.
또한 번제물을 드리는 구약의 제사는 지금 우리에게는 예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인은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예배란 이처럼 주님이 행하신 구원과 은혜에 대해 우리가 반응해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시인이 주님의 구원과 시험을 이기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서원제를 번제형태로 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서원이라는 것은 주님께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 이 서원은 내가 고난받고 있을 때에, 이 입술을 열어서, 이 입으로 주님께 아뢴 것입니다.’
그는 어렵고 힘들던 고난의 때에 주님께 기도하며 약속한 게 있었습니다.
주님, 저를 이 고난의 구덩이에서 구해주시면 주님께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번제’란 동물의 모든 것을 태우는 것입니다.
영어로’burnt offering’입니다.
말그대로 제물을 태워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번제의 제물이 바로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번제물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숫염소와 함께 수소를 드립니다.’
번제로 드리는 동물들이 바로 나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번제로 죽어서 완전히 태워지는 짐승이 곧 나인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태워져서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번제의 의미입니다.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시인은 번제로 ‘숫양, 숫염소, 수소’를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주님께 제사 한번 드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바치겠다는 표현입니다.
[증명]
양적으로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리는 것이고, 질적으로는 흠없는 짐승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가 아니면 받지 않으시고, 흠있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며 자기 앞에서 짐승들이 찢기고, 조각나서 불에 태워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지독한 냄새를 스스로 맡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순간에 내 자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다짐한 것입니다.
[적용]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삶에 고난과 시험의 순간들이 있겠지만 그때에도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주님을 신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짐승이 있나요?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그 짐승입니다.
우리의 삶을 숫양, 숫염소, 수소처럼 드리는 것입니다.
양적으로는 주일예배 후 우리가 살아가는 6일이 마치 숫양, 숫염소, 수소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질적으로는 그 6일을 죄짓지 않고 살아간다면 흠없는 짐승을 주님께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때로는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는 주님께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바로 구약시대 짐승을 태우는 냄새와 같은 것입니다.
감사와 헌신의 찬양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주님께 내 삶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찬양하면서 마음 속으로 한 주동안 주님, 저를 붙들어주세요.
분분초초 주님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설명]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갑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오너라. 그가 나에게 하신 일을 증언할 터이니, 다와서 들어라.
무엇을 들으라는 것인가요?
17절부터 20절입니다.
‘나는 주님께 도와달라고 내 입으로 부르짖었다. 내 혀로 주님을 찬양하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 찬양받으십시오.’
시인은 주님께 예배드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명]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나의 하나님을 간증할 게 있습니까?
내 삶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간증할 게 있습니까?
어쩌면 마음 속으로 그런 게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정말 어려운 나라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적용]
제가 필리핀도 가보고, 온두라스라는 곳도 가 봤습니다.
필리핀은 아시아의 거의 최빈국이고, 온두라스 역시 중남미의 최빈국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똑똑한 데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 하루벌이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나라, 자신이 선택한 부모도 아닌데 어려운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할 내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이런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는 왜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왜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새 날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께 날마다 예배드려도 부족한게 아닐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 중에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 Present 하루가 주님의 선물, Present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한편의 시를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헬렌 스타이나 라이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고통 중에 아름다운 시 한편을 쓰셨습니다.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버지 아시니
불평할게 무어랴
우린 언제나 햇살을 그리나
비가 내려야 함을 하나님은 아시니
우린 웃음소리
기쁜 환락을 사랑하나
만일 한방울 눈물도 모른다면
가슴속 부드러움은 사라지리라
때로는 괴롬과 슬픔으로
우리를 시험하시는 아버지
그 시험은 벌이 아니라
내일을 맞이하라고
우릴 도우심이어라
거센 폭풍을 이겨야
자라나는 나무들은 힘을 얻고
끌로 날카로이 도려내야
대리석이 아름다움과 형상을 얻듯이
하나님은 부질없이 우릴 헤치지 않으시며
우리 아픔 저버리지 않으시리니
무엇을 잃게 하시면 다시금 가득히 얻게 하신다오
그리도 아낌없이 보내신
축복을 헤아려 본다면
불평할 까닭도
슬퍼할 시간도 없으리라
우리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시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한결같기에
영혼의 아픔이 꼭 필요할 때
기쁨을 보내시는 일은 없나니
고뇌가 닥쳐오고
만사가 괴로울 때,
그건 우리 가운데 하나님 일하시어
우리 영혼 견고케 하시는 때라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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