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는 말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요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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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고 지금 일어날지 5분만 더 누워있을 것인지 선택했습니다. 식사를 하며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반찬을 먹을지도 선택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수요기도회에 갈 것인지 집에서 휴식을 취할 것인지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지를 하고 있든 아니든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지에 올리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실천할지 안할지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성도도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가 처음 듣는 교훈도 아니고 새로운 진리도 아닙니다.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1절 말씀 말고도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속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말씀이 사랑해야 할 것을 말하는데 아마 분량에 비해 가장 많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은 요한일서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요한일서라는 짧은 편지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53번이나 써가면서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성도들이 가장 많이 실패하는 영역이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에 실패하면 믿음에도 실패한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자주 듣고, 많이 들어 귀가 아프고 질린다 할지라도, 내가 실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사랑하라는 말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요’인데, 실제로 사랑할 때까지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또 들어야 하는지, 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말로 들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랑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사랑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이라고, 또 주고 받는 것이 있어서 하는 사랑이라면 우리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부담되지 않습니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가까이 해서 손해가 되면 멀리 하면 되는 그정도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정도 사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사랑이고, 한편으론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이런 것이라고 하니,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기 위해서 두 모델을 비교해 주십니다. 가인과 예수님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자기를 위해 형제를 죽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형제를 위해 자신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예수님이라는 두 모델을 제시하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모델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가인과 예수님 중 어떤 모델을 따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인을 모델로 이야기하면 우리 안에 드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되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가인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라는 마음이 들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인의 행동의 특징인데, 가인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을 하기는 하는데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해가 되면 미워하고, 나중에는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새번역성경은 본문 16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런 사랑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십자가에서 배웠습니다.
진짜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형제자매를 위해서 나의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합니까?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당시 사람들이 다 무시했던 세리도 하는 것인데 ‘그것도 사랑이라고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보이신 그 온전한 사랑을 너희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의 말씀을 우리가 너무 확대해석하면 위험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형제자매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나는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16절의 말씀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바로 다음 말씀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17절과 18절 말씀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예수님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려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 없어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 조금 사주고,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 조금 주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빠듯하게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배척당했기에 더 가진 것이 없었고,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다 먹어도 배고플 밥을 나누어 주는 것, 옆에 헐벗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입고 있는 옷으로도 저녁에 떨며 자야 하지만 옷을 벗어 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희생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희생이 있을 때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만 찾아가기 좋아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가지고 희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와 비슷한 학력을 가진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고, 생활 수준이 어느정도 맞는 사람과 교제하기 원합니다. 반면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 가까이 하면 어떤 손해를 감당해야 할 것 같은 사람과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니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마저 세상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니 이 사회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주변에 오래 참아 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참는 것이 희생입니다. 내가 쓰기에도 정말 빠듯한 생활비지만 나누어줄 형제가 있다면, 나누는 것이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이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나는 과연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다고 여긴 사랑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심각하게 고민하시고 이제는 자기 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하나씩 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 다르기에 우리는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듣고 또 들어야 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교리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무언가 틀린 것처럼 보여집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라고 쓰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씀으로 들었던 것과 달라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그 공로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공로는 오직 누구의 공로입니까?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의로움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조건입니다. 인간이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 할지라도 그 사랑으로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4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미 사망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믿습니다’라고 말해도 그 사람이 과연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우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구원을 받은 참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통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보고 ‘정말 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아’,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구나’라고 자신도 남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 날카로운 시선으로 형제를 보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진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직설적인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10절에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여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4절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 옮김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걱정만 하고 살게 됩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은 정말로 손해보고 사는 것이고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형제 사랑을 강조하시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반드시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엉터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4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먼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다음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으라, 그리고 사랑하라’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사랑보다 앞서 믿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진짜 사랑을 발견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사랑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얻을 참 믿음이라면 반드시 사랑이라는 열매가 따라와야 합니다. 믿는다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쭉정이 같은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가던 걸음을 돌리고, 믿는다 말하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실제적인 사랑의 손길 한 번 내밀지 않는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진짜 믿음이라고 보시겠냐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미국 동부 최고의 주차건물 설계회사인 「팀하스」 를 이끌고 있는 하형록 회장은 『페이버』 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자신의 삶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심각한 심장병 때문에 32살 때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몸에 맞는 심장을 기다리는 다섯 달 동안 그는 성경을 세 번 통독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나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 회장은 이렇게 서원을 합니다. “만일 저를 살려주시고 이 병원에서 나가게 해주신다면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얼마 후, 그에게 맞는 심장이 구해졌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방에 있던 환자가 자신과 똑같은 심장을 찾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더 다급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죽어가는 저 여인에게 네 심장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자신도 일주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판정을 듣고서도 그 심장을 옆방 환자에게 양보했습니다.
심장을 받은 옆방 환자는 살아났지만, 하형록 회장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일로 병원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하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직원과 의사, 심지어 환자들까지도 서로를 배려하고 돕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신앙이 있든 없든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 회장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직 과학과 의학만을 신봉했던 주치의 아이젠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 때문에 평생 하지 않던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습니다. ‘제발 이 남자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매일.”
한 달 후에 겨우 심장을 이식 받고 살아난 그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했고, 그의 회사도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사훈을 가지고 사회에 헌신하는 곳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구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한가지 열심히 하고 있는 작은 실천이 있습니다. 바로 헌혈입니다. 동성로 2.28. 공원에 헌혈의 집이 있는데 그 곳에서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시간을 20분 정도만 헌신하면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일이라 여겨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가니 1년 전쯤에 “조혈모 세포 기증에 동의해 줄 수 있겠냐”고 직원 분이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는 것이냐” 물었더니 그냥 등록만 해두면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연락을 할 것이고 그 때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고 해서 동의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 날 헌혈을 하고 나오는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하면 많이 아플텐데 하는 단순한 걱정이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나의 많은 시간들과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참 사랑 없는 마음을 가졌던 기억이 말씀을 준비하며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무너졌다고 말하고,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세상, 그런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목사님, 교역자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각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 사회는 회복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비록 그 사랑 때문에 손해 본다고 할지라도 사랑합시다. 희생하는 사랑을 행해서 비록 내가 이 땅에서 잘 되지 못하고, 무시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 나를 희생하며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는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에 쓸 것 주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야’,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기를 소망합니다.‘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 말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인 사랑이 우리 삶 속에서 풍성히 맺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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