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으로 승화되는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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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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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환영과 인사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에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찬송하며 사세요’하고 인사 나눕시다.
네 감사합니다. 8월은 묵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은 찬송과 신앙고백에 대한 묵상을 차례로 살피고, 9월부터는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을 살피고자 합니다. 원래 묵상이라는 주제 아래에서는 신앙고백을 다루고 찬송에 대해 살피려고 했는데, 사도신경을 쭉 강해를 하려고 보니 오히려 이 순서가 더 적절할 듯합니다. 오늘은 찬송으로 승화되는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S2. 주제 제시

신학과 신앙, 성도의 예배와 삶은 송영, 곧 찬송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찬송가를 제작하여 예배 중에 사용하도록 하고 있고, 목사의 직무 중에는 찬송을 가르치는 사역이 세 번째 직무로 헌법에 명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목사가 성도들의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찬송하는 생활을 잘 지도하도록 하고자 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 신앙, 예배는 모두가 찬양 즉 송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묵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묵상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우적 묵상이나 엄숙한 묵상을 통해 성도가 힘써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계시를 보여 주실 것을 기도로 구하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시는 교훈과 책망들을 깨닫고, 나아가 그것을 삶에서 행하면서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모든 묵상의 목적인 것입니다.

S3. 문제 제기

물론 찬송을 단순히 음악이라고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아니 신학이나 신앙고백의 그 중후한 무게와 음악과 같은 감정적인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감정이고 신학이나 신앙고백은 이성이고 지성인데 어떻게 이 둘을 동등하게, 아니 신학의 목적을 음악에 둘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단순히 곡조만을 흥얼거리는 음악을 찬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을 음악을 수단으로 한,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로 이해한다면 이런 문제는 해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 곡조를 담고 있고, 사람의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지정의 전인을 담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서의 찬양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묵상의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J1. 하나님의 심정, 속성, 그리고 방법

실제로 우리 하나님은 시편을 통해 많은 찬양 시들을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다윗 왕과 같은 이는 별도의 찬양대와 악대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제작하여 예배드리는 삶에 힘을 다 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찬양 시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성경에 자신이 영감하신 많은 찬양들을 수록하여 오고오는 세대의 성도들이 이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칼빈과 같은 이는 시편으로만 찬양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할 정도로 성경은 찬송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본문인 시편 8편은 저자 다윗이 온 우주의 창조물들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는 1절과 9절을 수미쌍관으로 댓구적으로 반복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같이 봅시다.
시편 8:1 NKRV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9 NKRV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기에 보면 다윗 왕은 온 땅에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1절 끝에서는 하늘을 덮은 주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가 찬양하는 이는 바로 여호와, 곧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주의 이름을 가지시기에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가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는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데 , 먼저는 3절에 나타난 대로 하늘의 모든 천체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묵상한데서 출발합니다. 3절을 봅시다.
시편 8:3 NKRV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먼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며 창조주를 묵상합니다. 이 묵상을 좀 더 넓게는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인간에게 맡기시고 그를 존귀한 자리에 두신 그 은혜로 확장했습니다. 우리 6-8절을 봅시다.
시편 8:6–8 NKRV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이처럼 다윗은 창세기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존귀함을 묵상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자연과 만물을 보면서 사람에게 자신의 형상을 두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자비하심과 사랑을 깨달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8편은 다윗에게 주신 경우적 묵상의 전형적인 찬송 시입니다. 다윗은 찬란한 자연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시고 아담 안에서 인생이 얼마나 큰 영광을 누리며 살게 하셨는지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묵상을 이어 찬양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J2.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런데 다윗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할 때 그는 특별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주를 대적하는 이들, 원수들과 보복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입의 권능으로 무너질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2절 말씀을 볼까요?
시편 8:2 NKRV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과연 광대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싶은데 다윗의 시에는 그런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대적들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셔서 잠잠케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문자적으로 보면 아이들이나 젖먹이들은 아직 말을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이런 젖먹이의 입의 힘이라는 것은 어린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만으로도 원수들은 그냥 잠잠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적자에 대한 묵상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대적자들의 도전은 좀 더 넓게 보면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으로인한 인간의 부패를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하신 과일을 따먹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죽음의 심판의 자리에 떨어진 자입니다. 이 자체가 바로 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대적자가 아니라 원래 이 아담이 얼마나 위대하게 지어졌는지를 묵상합니다. 다윗은 4, 5절에서 처음 인간의 위대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8:4–5 NKRV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는 ‘마 에노쉬’라고 해서 이때 ‘에노쉬’는 연약하고 ‘병든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에 오는 ‘인자가 무엇이기에’는 ‘벤 아담’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도대체 이 연약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뭐라고 주님께서 ‘돌보십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떻게 이런 존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의 옷을 입히셨나요? 하고 연약함과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분명 이런 놀라운 지위를 가진 존재입니다.

J3.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위대함을 가진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연약한 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인간은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 모든 타락이 구원자로 오시는 메시야의 존귀함을 통해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그 인간으로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여기에서 고백하는 사람의 아들은 첫 아담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지만, 오실 메시야에 대한 깊은 묵상의 발견으로 보는 것이 적저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구원의 주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고난의 메시야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어졌다가 죄로 인해 심판의 자리에 이른 첫 아담을 대신하시는 참 인간으로 오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인간의 천상적 지위가 회복이 됩니다. 다윗이 묵상하듯이 오실 메시야는 참 사람으로서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시며, 죄인인 우리들도 바로 그 은혜의 통치 안에 포함시켜 주실 분이십니다. 묵상 안에서 이 은혜의 메시야를 발견하게 되자 다윗은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의 놀라운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W1. 이처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성도의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 되십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묵상의 대상이 되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찬양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는 묵상을 통해 찬양의 자리로 나아가며 묵상 안에서 깨닫게 된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양을 통해 경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묵상이 지향해야 하는 최고의 방향입니다. 성도의 묵상은 모든 신학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W2. 그러므로 성도의 찬양은 묵상의 참된 열매입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저 음악을 흥얼거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찬양은 참된 묵상을 통해 드려지는 것입니다. 내용 없는 음악은 진정한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묵상가는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한 찬양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찬양의 사람이 바로 참된 묵상자인 것입니다.

W3. 하나님은 성령님 안에서 신령한 노래로 찬양을 받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중생자의 삶이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 19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5:18–19 NKRV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문맥적으로 볼 때 성령에 충만한 삶은 마음으로 주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는 찬송을 노래로 가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흥청망청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노래는 묵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깨달은 자들이 부르는 찬송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의 입에서 바로 이 찬송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T1. 다윗은 바로 이 찬송하는 자의 복을 누립니다.

그는 무수한 경우적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남겼습니다. 목동으로 시작한 인생이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는 위대한 왕으로 변화되어졌지만, 그의 삶에는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에 있을 때는 시를 지었고, 쫓겨 다니면서도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으며 마침내 노래를 지어 후손에게 남겼습니다. 특별히 시편 8편의 제목은 이 노래가 큰 기쁨의 노래임을 알려 줍니다.
시편 8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깃딧에 맞추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두 의견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블레셋 가드에서 행진곡으로 부르던 리듬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포도주 틀을 밟는 동안 부르는 노래로 이해합니다. 어떤 경우든 이 시는 기쁨을 올려 드리는 찬양의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자연과 만물들, 그리고 이적들을 통해 구원주이신 메시야를 깊이 깨닫고 창조주요 구세주로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며 찬양의 노래를 남겼던 것입니다.

T2. 오늘날 우리 시대는 이런 기쁨을 잘 누리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주신 것에 감사하는 삶이 없고, 주어진 것들은 항상 비교하여 불평하는 데 사용이 됩니다. 먹을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 것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불평합니다. 나는 왜 두 달란트밖에 없는 데 저 사람은 왜 다섯 달란트냐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평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삶에는 찬송이 없는 것 같아요. 인터넷에는 넘쳐나는 찬송이 있고, 예배용으로 교단이 만든 찬송가들도 많이 있는데 그것을 입으로 부르고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T3. 그러나 성도는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날마다 그 은혜를 묵상을 통해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아름다운 찬송 시들을 남겨 주셔서 오늘 우리가 그 노래들에 곡을 붙여 부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 이 시대에 노래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성경의 주제를 따라 찬송을 분류하여 공예배 시에 찬송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주제 찬송가인 찬송가 442장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라는 제목일뿐만 아니라 ‘주와 동행’이라는 분류 주제의 찬송입니다. 우리 찬송가는 ‘제목 분류’를 두고 있는데 대체로 찬송가 4, 5쪽에 보면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찬송을 분류하는 제목들을 보면 이 자체가 바로 우리의 신학이고 예배이고 삶을 말합니다. 곧 삶의 모든 자리에서 찬양이 가능하다도록 찬송을 준비해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L5.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의 묵상은 찬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찬양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곧 성도는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묵상과 노래가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쁨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기쁠 때는 기쁨의 찬송을 부르고, 슬플 때는 슬픔의 찬송을 부를 줄 알 때 우리의 삶은 성숙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 감사할 때, 미래를 두고 소망이 생겨날 때 우리 모두는 찬송을 통해 이 모든 삶을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예배나 개인 묵상이나 혹은 전체가 모일 때 성도는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L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다윗 왕은 온갖 악기와 음악을 동원하여 자신에게 주신 성령님의 묵상을 노래로 표현하여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또한 온 땅에 주신 만물들을 지나치며 그 모든 것에서 죄인인 인간의 연약함을 기억하고 구원주로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위대하고 찬란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온 땅을 지으신 위대한 창조주를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십니다. 또한, 죄인인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높이 찬양해야 하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더하여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님께 우리 모두는 찬양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 모두에게는 삶의 모든 묵상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승화되는 놀라운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묵상은 곧,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역사를 통해 주신 많은 찬송가들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을 찬양을 만들어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은혜들을 내 것으로 활용하여 찬양을 드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묵상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묵상하며 찬양에 힘써 복된 성도의 열매를 맺으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찬양

시편 8편 여호와 우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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