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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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주 고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고난이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상처만 남는 패배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우리의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일 때 이 고난은 축복이 됩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고난을 겪는 이들의 다양한 기도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쉽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이런 복잡한 인생가운데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곧 우리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냈는 지 그들의 기도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서 시인이 겪는 고난이 무엇인지 볼까요?
그는 폭력의 위협, 비난, 음모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자신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욕먹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이 나를 두고 말하기를 “하나님도 그를 버렸다. 그를 건져 줄 사람이 없으니 쫓아가서 사로잡자”합니다.”
원수들은 현재 시인이 비참한 신세가 된 이유를 하나님이 그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시면 그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어릴적부터 주님을 잘 믿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엄마가 믿는 분이라서 모태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평생 주님을 섬겼는데 현재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봐라, 우리가 이렇게 너를 괴롭혀도 너의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시지 않지 않느냐?”
“너가 그렇게 믿고 있는 그 분이 너를 버리신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잘 했다고 다 성공하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누가 교회다니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별볼일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뭐 하나님 믿어도 별거 없구만 왜 굳이 그렇게 믿으려 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그게 너무나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고난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난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쁘게 만듭니다.
우리 삶을 바쁘게 하는 것이 마치 마약처럼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들어, 가정에 위기가 있는데도 일에 몰두하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마귀의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고난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고난은 피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 겪어내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짊어지신 고난의 십자가가 구원의 비밀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삶의 고난을 몸으로 체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를 가진 분들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일상입니다.
그들은 밥도 혼자 쉽게 먹을 수 없고, 화장실도 혼자 가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장애에 절망하며 비관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모든 고난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배움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습니다.
여러분 아직 도쿄 올림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들은 올림픽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패럴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고난을 몸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넘어서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다리가 없는데 열심히 손을 저어가며 수영을 하고,
한 손과 한 발이 없는데 어렵게 균형을 잡아가며 싸이클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합니다.
솔직히 그들이 눈, 손, 발 다 있는 우리보다 더 자유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시편에 나온 시인은 고난을 몸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그 고난의 아픔을 주님께 가져갔습니다.
그의 간절한 고백을 보십시오.
건져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는 간절히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제가 예전에 교회차로 어디를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졸았는데 다행히 신호등에서 신호 기다리다가 졸았습니다.
눈을 딱 떴는데 나도 모르게 급 출발하다가 앞 차를 박았습니다.
놀랍게도 앞차는 범퍼만 조금 기스나고 멀쩡했습니다.
문제는 제 차가 소형차라서 완전히 찌그러졌다는 것입니다.
수리비가 30만원이 나왔습니다.
내 실수이긴하지만 하나님일 하다가 겪은 것이라서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차량 담당 간사님도 제 잘못이라며 교회 규칙상 30만원을 저보고 다 내라고 했습니다.
짜증도 나고 억울했습니다.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하나님은 내게 왜 그러시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를 하는데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그렇구나.
주님이 내게 값싼 수업료를 지불하게 하셨구나.
졸음운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30만원으로 가르쳐주셨구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비용이 팔 하나, 다리 하나였으면 어쩔뻔 했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제 짜증이 아니라 감사가 올라오더라구요.
와, 감사하다.
수업료 30만원이면 너무 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처럼 생각의 작은 전환 하나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난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이들은 고난을 패럴림픽 선수들처럼 도전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섬김의 기회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고난을 겪고 봤기에 누군가를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독한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인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법입니다.
어릴적 가정불화를 겪은 상담사는 어느 누구보다 더 가정불화에 대한 상담을 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두가지 극단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먼저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난에 눌려서 지냅니다.
그들은 고난을 내가 지불해야만 하는 죄값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 들으신 적 있으실거에요.
‘이게 다 내 업보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고난을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나의 죄로 인한 고난일수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고난은 감옥처럼 그 사람을 가둬버립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38년동안 병자로 산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연못에 들어가면 병을 치유해준다고 소문난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물이 움직일 때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매번 절망했고, 어느 순간 이 병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라는 감옥에서 나와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완전 정반대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막연한 낙관주의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맞는 말일수도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그냥 아무 이유없이 내 삶의 스케줄에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스케줄가운데 꼭 방문해야할 손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근거없는 낙관주의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그 문제를 믿음으로 주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께 내 짐을 맡기는 것을 무책임하다거나 나약한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것이 자기 삶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운명론적 패배주의도 아니며, 근거없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14절에서 시인이 보인 태도를 보십시오.
지금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닙니다.
원수들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희망을 주님께 두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완전히 주님께 맡겨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찬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맡긴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비록 그 뜻을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주님의 의로우심을 내 입으로 전하렵니다’
하나님께 맡긴 자의 말입니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 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어떤 트럭기사분이 힘겹게 큰 짐을 머리에 짊어지고 가시는 아주머니를 보고 트럭 뒷 자리에 태워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계속 내려놓지 않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미안해서 그렇다고 했답니다.
어쩌면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이 이 아주머니와 같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 우리 삶의 짐을 맡겨드리는 것이 바로 주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머리에 이고 있던 짐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자유하게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서커스를 보신 적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서커스의 백미는 공중그네타기입니다.
저도 언젠가 해외에 가서 본 적이 있는데요.
공중 그네타기에서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몸을 던지는 사람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 몸을 던지는 사람을 붙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가 안 잡아주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손을 놓고 주님께 우리의 몸을 맡길 때 주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아직도 ‘주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답답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맡기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태도는 기도와 찬양이라는 점입니다.
시편자체가 기도이자 찬양입니다.
기도는 내가 마지막에 하는 최후 반응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반응입니다.
기도는 고난을 나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뜻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내가 겪는 고난에 대한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마지막에는 기쁨의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거쳐 찬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기도가 노랫가락이 된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도저히 찬양할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게 그리스도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소망을 주님께만 두고 더욱 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기도가 찬양으로 바뀔 때 고난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끝나고 이제 주님께 온전히 맡기게 될 때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억지로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몸을 비틀어가며 발버둥치다가 주님께 맡기게 되는 과정입니다.
과거 로마시절 엄청난 핍박이 일어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담당 총독이 자신의 부하에게 어떻게하면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 물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총독은 그리스도인들을 다 감옥에 처 넣는 게 어떠냐고 자신의 부하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부하가 안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형경기장에 넣어서 그들을 사자밥이 되게 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부하가 안된다고 대답합니다.
하도 이상해서 총독이 왜 안된다고만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감옥에 넣으면 그들이 하도 찬양을 불러서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린다고 말합니다.
원형경기장에 넣으면 그들이 담대하게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놀라 기독교에 대해 궁금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길래 그들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가?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그 누구도 고난을 겪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께 고난을 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의 태도만큼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고난은 도전의 기회, 섬김의 기회,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해 도망가야 할까요?
고난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고난에 깔려 살아가야 할까요?
고난을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넘겨야 할까요?
고난은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다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의 시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11세에 예기치 않게 뇌성마비로 전신마비는 물론, 언어 능력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합니다.
결국, 귀와 눈만 살아있고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미즈노 겐조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얼굴에 작은 웃음과 눈을 깜빡이는 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가 눈으로 문자들을 선택해서 시를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문장을 쓰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는 글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는 네권의 시집을 냈는데 그중 첫번째 시집 이름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감추어져 있다] 는 제목의 시입니다.
풀도 꽃도 없는 겨울 마당에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북풍이 불고 눈이 내린 겨울 마당에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다
눈 아래 땅 속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