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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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하는 권면
사랑으로 하는 권면
빌립보서의 마장막 장인 4장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앞에는 원인이 나오고 그 뒤에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러므로 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행동, 즉 이웃을 사랑하는것, 하나님을 경외하는것 이 모든 기독교적인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이렇게 하라 라고 이야기할때 그 행동의 결과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인행동의 원인이 무엇으로 부터 시작하여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성도의 삶이 가능해지려면 그 앞에 원인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저 막연하게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삶을 산다고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 분명한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받고, 복음을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 원인 때문에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거쳐 성도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3장에서 바울은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이 배라고 말합니다. 배라는 것은 탐욕과 정욕과 충동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여기서 식민지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빌립보 지역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 시민의 특권을 누리며 살았으며 스스로 로마시민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빌립보 시민들에게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에게 황제숭배에 차석하지 말라고 권함으로 로마 시민같이 살지말고 로마의 시민권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에 더 유념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배경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도시 안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새롭게 섬기는 것은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의 주인 황제를 섬기는 것과 상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빌립보 교회에게 바울은 권면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으로서 살아갑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런 존재이므로,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가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귀한 은혜를 알고, 그 은혜가 우리를 실패함 없이 구원의 영광스러운 완성으로 데리고 갈줄 알고있으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그런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이 놓여 있으니 주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주 쓰는 문구입니다. 바울은 이 문구를 예수그리스도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여 등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바울은 총 3번의 주 안에서 라는 말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합니다.
첫 번째로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대적들의 핍박이 있지만 만유를 다스리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합으로 굳건히 서 있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라 라고 하는 단어는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군사적 용어로써 진렬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있습니다. 군인이 그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지켜낸다는 의미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끝까지 그것을 견디어 낼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혹은 우리 주위의 상황에서 저정도면 포기할만도 한데 저런 상황이라면 다른길을 선택할 만도 한데 끝까지 버티거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버티게 되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이유가 다양합니다. 가족이 이유가 될 수있고 개인의 욕망이나 자존심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서라 끝까지 그 자리에 서 있어라 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주 안에서 서라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순종하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서라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그리고 지금 이 성경을 보는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 너희들을 힘들게 하여도 주 안에서 서라 라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실제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두 번째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대상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입니다. 이 두 여성은 교회에서 아주 힘이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나뉘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힘이있는 두 사람이 다투면서 서로의 영혼이 다치고, 교회가 하려는 일들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아픔이 빌립보 교회 안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서 연합과 하나 됨을 권면합니다. 두 사람의 문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릅니다만 아마 그 문제의 근원은 진리의 문제나 죄를 짓거나 거룩함을 무시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였다면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문제가 개인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함께 속해 있는 두 사람의 기질과 성격과 생각과 경험이 다른데서 오는 오해와 차이 때문에 서루 다투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통하고 생각과 마음이 같아서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이념 공동체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각이 같아서, 마음이 맞아서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때문에, 그 구원하심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하나되기를 힘써가는 공동체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계속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각자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떻게 문제가 없을수 있겠습니까? 교회와 세상의 차이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납니다.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관계의 문제가 생겼을때 안보면 됩니다. 혹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을 배척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문제를 어떻게 다루라고 이야기합니까?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칩니다. 생각과 경험과 기질의 차이에 집중하지 말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서 교회라는 한 공동체로 묶어 놓으신 것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는 바로 그것 때문에 연합을 지켜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기질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연합하고 하나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로 불러주신 성도들을 위해 자기를 굴복시키고 힘써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어서 3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다툴때 ‘그들이 다투는구나’하고 그냥 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들이 다툴 때 나의 문제인 것처럼 여기고, 그들이 연합하고 회복하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인것처럼 여기면서 돕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곳이 교회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이 세상 모임과의 차이 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고민과 고통과 문제가 다 사라지는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기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어려운 일들은 금방 풀리는 기계적인 기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다 경험하는 것 처럼 아픈일도 있고, 실패도 따라오고, 떄로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할 때 그 핵심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기쁨은 주로 수동적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충족되거나 어려운 일이 해소되면 그것을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뻐지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쁘지도 않는데 어떻게 기뻐하나? 좋은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뻐하나? 예수님은 그 답을 이미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직역한다면 이러한 뜻입니다. ~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자 이 상황만으로는 도저히 행복, 기쁨이라는 단어와 연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말로서 설명이 되어집니다. 천국을 받고, 위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단순히 대가가 주어지기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그 모든것이 의미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행동은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뻐하라는 명령앞에 주 안에서의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때문에 주어지는 수동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주어진 기쁨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 주님이 몸과 피로 사 주신 기쁨을 어떤 삶의 경험에 의해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뻐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주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항상 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예수님을 앎으로, 그 사랑과 은혜를 누리므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이 오늘 권명하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이끌 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를 찬양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이끌 것입니다. 그기쁨을 서로 나눔으로 우리는 교회되어 갈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권면하면서 주 안에서 행동할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성도의 삶의 원인은 주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법과 질서, 주님의 말씀이 성도와 교회의 삶의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 안에 거함으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굳건히 서며, 주 안에 거함으로 한 마음을 가져 교회됨을 이루고 주 안에 거함으로 수동적 기쁨이 아닌 적극적으로 기쁨을 이루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