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9_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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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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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거룩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구별하여 거룩한 주의 날로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교회의 지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며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한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며 주신 은혜와 주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이웃과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실천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상적 고백과 다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참혹하리만큼 비참하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하는 예배도 힘들다. 예배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오늘을 주의 날로 구별하여 거룩하게 보내는 방법도, 도움도 바받기 어렵다.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상의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쳇바퀴다.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라치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있다. 맞벌이 부부의 일상인은 전쟁터이다. 저녁까지 업무가 끝나지 않거나, 일해야 하는 직장, 한순간도 내버려 두지 않는 육아 앞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사라지기 쉽다. 결단하고 노력하리라 결심했던 나의 다짐은 자책과 후회와 죄송함으로 가득할 때가 많다.
이런 삶의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한 믿음을 소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모습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몇 주간에 살펴볼 우리의 관심사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정체성 찾기다. 앞으로 몇 주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재정립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실제의 삶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믿음으로 사는 나의 모습 찾기다.
그러므로 오늘은 첫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가를 볼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먼저 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의란 무엇인가?

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로마서 1:17 절을 떠올린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의와 믿음이다. 믿음이란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빌3:9 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 특별히 내가 가진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의는 정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 사회과 대선정국에 이르면서 정의는 쉽게 정의되고 있다. 정의롭다는 것은 같은 문제를 두고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이고, 누가 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는가, 누가 더 단단한가, 누가 더 인내심이 강한가의 문제다. 좀 더 강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도덕적인 순결을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관계적 용어다. 대상과 어울림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환영받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의의 반대말은 부정, 부정의가 아니고 거절이다. 환영이 아닌 거부당함을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의는 거절당함이 아닌 환영 받음이다

우리는 수많은 면접을 본다. 시험이나 직장 또는 일정한 경쟁을 해야 상황에서다.
면접은 주로 지원자가 제출한 서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력서, 자기소개, 지원동기, 포부, 앞으로의 계획 등등 자기 서류와 주변의 추천서, 평가서를 동봉하게 된다. 면접이 시작되면 면접관은 내가 제출한 서류를 면밀하게 살펴 들추면서 이야기한다. 인성평가와 심층 면접의 경우, 인격적 모독의 수준까지 넘나들면서 진행되기도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시험하려고 코너로 밀어 넣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떨어진 것 아니야. 저런 질문을 하는 것 보니, 저런 말을 하는 것 보니 난 떨어질게 틀림없어라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극한의 상황의 끝에 환영의 눈빛을 보이면서 당신은 합격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받아들여짐에 대한 희열을 느낀다.
대선정국이니 선거을 생각해보자. 선거의 승리공식 중 네거티브는 항상 통한다이다. 사람들은 네거티브가 싫다 하면서 정정당당한 정책대결을 하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네거티브에 따라 표를 던지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한다. 선거가 박빙이거나 2위 후보가 1위 후보를 이기기 위한 명목으로, 면밀한 조사, 철저한 검정이라는 핑계로 후보자의 인생이 훑어지기 시작하면 여론이 들썩인다. 심하게 흔들린다. 심지어 과거의 말뭉치, 화법, 자녀, 부모, 형제까지 모두 탈탈 털어서 작은 흠결이 나오면 도덕적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네거티브에도 불구하고 흠결이 많다고 생각된 후보가 당선되면 어떻게 되는가? 후보는 제일 먼저 하는 말은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임에도 믿어 주어 감사하고 하면서 정의가 승리했다고 한다. 반면에 낙선하여, 거절당한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우리는 의를 환영과 거절로 이해한다. 의는 내가 아닌 남의 눈에서 은혜를 입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보문인 빌립보서에서 "내가 가진 의"는 내가 받아들여지고 거절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거절당하는 의라는 말이 되겠다.

내가 세운 의

사람이 세우는 자기의
의를 환영, 즉 받아들여짐과 거절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빌 3:9 절에 따르면
빌3: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의 지킴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환영해주고 받아주시지만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여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는 순식간에 된 것이 아니다. 수년에 걸쳐서 수천 개의 사고의 날줄과 씨줄의 엮임으로 형성된 것이다. 5절은 그것을 보여준다. 태생, 신분, 학습, 교회 공동체가 협력하여 자신의 사고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표준이 개발된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바울에게는 6절에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인간 예수를 따르는 저 신성모독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인생의 표준이 된 것이다.
우리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태생, 신분,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학습했는가? 당신의 부모님의 말씀, 선생님의 말씀, 친구들의 말, 부부의 말, 직장동료의 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 등등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가장 기쁘게 여기는가? 무엇을 할 때 거절당하지 않고, 환영받았는가? 이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이 말들의 조합이 우리의 의의 표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내가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고 자기의 의를 세우며 애쓰고 있다.
문제는 자기 의를 세우며 애쓰는 인생의 결과가 자책으로 가득한 죄책감과 불안이라는 사실이다. 어느덧 우리의 나이가 중년을 넘어가고 있다. 옛날 말로 불혹을 지나고 있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젊을 때 이상과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했지만 이제부터는 쉽지 않다. 누구나 만족이란 없겠지만 어느 정도 자신이 꿈꿔왔던 삶의 현실을 맛볼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다자녀의 꿈을 이루긴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하다. 젊을 때 빨리 낳을 걸 자책하고, 육아의 짊을 넘겨준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내 나이 환갑을 넘긴 나이에 온이를 군대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항상 지난날에 대한 후회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말을 수없이 듣고 수긍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죄책감과 불안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런 거짓 가르침과 거짓 위로를 과감하게 물리치라고 한다.
바울이 7-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분명 유익을 준다고 한다. 세상은 모조리 다 나쁘거나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세운 의, 사람이 세운 의를 해로 여긴다고 한다. 유익하던 것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긴다고 한다. 왜 그런가? 계속해서 8절을 보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렇다.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의 의를 통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짐을 받으려고 했던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환영은 내가 결단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다.
9절 하반 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그리스도의 초청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말한다.
9절을 다시 보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한다. 다시 번역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하여 하나님 의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가 주신다. 내가 세운 의는 내가 환영받기 위해, 내가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노력하고 나의 애씀이 당연하게 따라온다.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지위다. 내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인정은 지위를 통해 형성된다. 더 높은 지위는 더 많은 환영과 환대를 받지만, 지위가 낮을수록 거절과 무시를 당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정확하게 싸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나의 지위가 나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위를 주신다. 롬8:15절을 보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양자의 영의 지위를 받는다.
우리는 그냥 종이 아니었다. 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사형이라는 판결을 앞두고 있던 죄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처형을 멈추고 다른 사람이 와서 내가 지불해야 할 값을 대신 갚아주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지불해야할 죄의 값, 종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치러야 할 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이다. 더하여 값을 지불하고 죽음에서 풀려난 종은 목숨만 살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도 받는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더는 종이 아니라 마음껏, 직업도 선택하고, 사람도 만나고, 거리도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관련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된다. 마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처럼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완벽한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의 일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기에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의를 가진다는 말의 의미는 둘째,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환영해 주신다. 우리의 한주일의 삶을 돌이켜보자. 앞서 말했듯이 일주일 동안 쉴 새 없이 일생의 걸음걸이에 지쳐 하나님과 상관없이, 아니 주일이 오는 것조차 깜빡할 정도의 정신없는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때론 생각의 저편으로 하나님을 치우고 내 생각과 나의 열정과 나의 지혜의 탐구를 위해서 열심히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할까? 예배순서에 따라서 죄고백을 하면 매일 똑같은 반복된 지루한 죄고백으로 끝나버리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모습을 보시고 반겨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는 우리의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신다. 이 사실을 히7:24-25절은 다음과 같은 웅장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6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다.
우리는 자신의 의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 앞에 환영을 받을 수 없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하시는 장면은 우리의 현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반에 관해 이야기 하실 때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 큰 소리로 장담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을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눅22:31-22절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렇다. 우리 주님이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신다. 네가 너의 삶의 개척과 지지와 변화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 되어 너와 함께 하는 것이 너의 행복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우리의 행함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입었다는 말이다. 결국, 내가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의로 하나님의 환영을 받는 일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의로 작용하는 수많은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이 아닌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우울과 절망을 가져오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기쁨과 화평과 희망과 평안을 준다. 이 선물을 누리길 바란다. 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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