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삼위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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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러분 햇님과 바람이의 동화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햇님과 바람이 어느 날 내기를 했습니다. 그 내기는 지금 걸어 다니는 저 남자의 옷을 누가 먼져 벗게 만드느냐였습니다. 햇님과 바람이는 서로가 자신이 만만하게 자신이 이길 것이라 자부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고 바람이가 먼저 남자의 옷을 벗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온갖 힘찬 바람으로 남자의 옷을 날려버릴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비-바람이 거세게 불수록 더욱 옷을 여미고, 옷이 날라가지 않게 했어요. 바람이는 지쳐서 남자의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해는 바람이 포기한 것을 확인하고, 남자에게 따뜻한 열기를 보냈고, 따뜻하고 뜨겁게 했어요. 너무 더워서 참다못한 나그네는 자신의 옷을 벗어버렸어요.
바람은 힘을 다해 남자의 옷을 벗기려 했지만 실패했고, 해님은 남자에게 큰 바람을 불지도 않았는데, 해의 따뜻한 열기로 남자의 옷을 벗긴 것을 보았을 때, 초대교회의 모습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습니다. 강력한 박해는 성도들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여미며 단속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종교를 허용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펼치며 달콤하게 타협을 외칠 때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읽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버렸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보다 더 큰 유혹과 타협의 위기에 놓여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극심한 박해 속에 있지 않지만, 신앙의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시대입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신앙생활이 편해지고,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돈/경제라는 강력한 무기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이러한 유혹에 빠져있거나, 치열한 전투 중에 있는 교회에게 주님은 요한을 통해 참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계시하신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는 이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요한계시록의 서론
오늘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서론(1:1-8), 본론(1:9-22:5), 결론(22:6-21)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서론을 생략하고 본론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문을 열어야 하듯이 책의 내용을 잘 알려면 먼저 서론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거대한 집에 들어가는데 문에 해당하는 서론을 대충 넘어가서는 안되겠죠?
1) 요한계시록의 서언
계 1:1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 책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입니다. 대개 원어를 보면 ~의라고 사용되는 것은 소유격인데, 이 소유격은 해석이 다양합니다. 첫 번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책이라는 의미이죠.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며, 재림의 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분이시라는 전체적인 의미가 요한계시록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요즘 책은 표지가 있고, 장과 제목이 쉽게 들어가지만 고대에는 종이가 귀했고 책의 형태가 두루마리 였기 때문에 표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글의 첫머리에 붙여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책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될 수 있겠네요. 네 이 모든 것이 책의 내용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계시란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인데, 드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자가 계시를 받는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어 주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상징과 이미지가 자주 나와 사도 요한의 개인의 상상력이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계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이 만든 상상력의 책이 아니라 1:1의 하반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보여줍니다. “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리고 요한이 받은 계시는 일곱 교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대단히 상세하게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요한이 거짓말을 치거나 자신을 높이려 했다면, 하나님 다음으로 권위있게 자신으로 끌어왔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계시의 근원이 사도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1:1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후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시를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히브리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삼중 직분(왕, 선지자, 제사장)을 나타내 보이셨고,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내주시는 것입니다.
2) 계시의 내용(반드시 일어나고, 속히 일어날 일)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것은 계시하신 것은 반드시 일어나고, 속히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과 속히 될 일을 말씀해줍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예수님이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반드시 오시며, 속히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났는데 왜 이 일은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는 ‘속히’라는 말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속히라고 하는 것은 몇 년 후, 몇 시간 후와 같은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 아닙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을 함께 봐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단 2:28을 볼까요?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후일은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로서 우리가 종말이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께 받은 환상은 바벨론의 종말에 대한 환상이었는데, 이 일의 성취는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시대로부터 한참 지난 후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말한 후일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란 모두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의 오심은 역사적으로 초림과 재림의 두 단계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승천하셔서 올라가셨듯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것이죠. 이 두 사이에 끼인 기간을 신약성경은 종말, 말세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끼인 기간에 생기는 모든 일은 ‘속히’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속히’ 라는 말은 이렇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구속사의 긴 시간표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말을 뜻합니다. (이뤄졌고,이뤄질일들)
적용 : 그래서 성도의 삶은 주님의 속히 일어날 말씀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지켰지만, 타협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 모든 말씀이 속히 이루어질 세대에 살고 있으므로 신앙의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됨.
3)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의 복/ 어떤 자가 복이 있는가?
(1) 읽는 자와 듣는 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읽고, 듣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읽는 자’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공적인 예배시간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보통 절기 때 다섯 명의 성경 봉독자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들은 본 받아 예배 시간마다 성경 봉독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며 전도를 할 때마다 어디를 갔냐면, 회당에 가서 성경을 낭독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예배 시 공적으로 낭독이 되도록 만들어진 회람서신이었습니다. 성경 봉독자가 소리를 내어 읽게 되면 나머지 회중들은 귀로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서언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들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자가 됩시다.
그리고 읽고, 듣기만 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여 지키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들음과 순종, 믿음의 실천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행함이 죽은 것처럼 듣고 지키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1. 편지의 인사말과 송영(1:4-6) 1) 인사말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이라고 했죠? 네 일곱교회에 보내는 회람서신이라고 했죠. 편지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대개 편지를 쓸 때 받을 사람을 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의 편지 습관은 우리와 반대였습니다. 보내는 사람을 먼저 쓰고, 그 다음 받는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인사말이 나옵니다. 요한의 편지를 한번 읽어 볼까요? “계 1:4-5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자 이 본문도 당시의 편지의 용례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 보이시죠? 발신자와 수신자, 인사말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식사하셨어요? 영어권에서는 굿모닝입니다. 이 인사말에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과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인사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샬롬’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넘치는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이 평강은 사람을 통해 오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구했던 것입니다.
(1) 삼위 하나님
우리가 염원하는 은혜와 평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직 삼위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요한은 삼위 하나님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요? 1:4을 함께 읽어볼까요? “1:4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이신 성부 하나님을 언급했고,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신 삼위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2) 성부하나님(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첫째로.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가지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역사의 한 순간에 존재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이는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재로, 하나님은 역사를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미래에도 계실 분이 아닌 역동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장차 오실 분’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계획에 따라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서 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역사는 완성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세상, 역사의 주인이 사람인 듯 보이지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원수를 무찌르시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2) 보좌 앞의 일곱 영(1:4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 계신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역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구속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곱 영’이라고 하신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성령님을 일곱 영이라고 부를 때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스가랴 4장의 배경이 있습니다.(슥 4:2-3)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일곱 개의 가지에 일곱 개의 등잔을 가진 한 등대와 그 등대 좌우에 있는 두 개의 감람나무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가랴도 이 환상이 이해가 가지 않아 하나님께 여주어 봅니다. “슥 4:4 이 일곱 등불을 가진 등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11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일곱 등불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고,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개 기름은 감람유를 쓰는데, 이 감람유가 감람나무의 열매입니다.(올리브나무) 그리고 이 두 감람나무는 등불의 채움을 받아, 성소를 밝혔고, 또한 기름은 선택이 된 자에게 기름이 부어져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를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스가랴 시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은 성전건축을 완성할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감람나무는 성전 건축을 완성할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당시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래서 이 환상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지도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성전 건축을 완성 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슥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이처럼 사도요한이 이 말씀을 배경으로 ‘보좌 앞의 일곱 영’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슥 4장의 환상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실 때 보좌 앞의 일곱 영 되신 성령님을 통해 그의 종들에게 기름-성령을 부으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말씀은 성령께서 일곱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할 천상의 교회로 완성시켜 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3) 성자 예수님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여기서 특이한 점은 성자 예수님이 맨 뒤에 언급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더 많은 지면에 언급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서 본적 있으신가요? 하나님께 적대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법정에서 증언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증인으로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충성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악의 세력에 대해 죽을 각오를 하고 증언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으로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언하시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죠? 이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의미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무에 열매가 달리면 앞으로도 계속 달리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 할 것이라는 부활의 원형이요, 보증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참 소망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통치 범위는 죽음 뿐만이 아니라 깡의 모든 왕권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 만주의 주 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상의 왕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이 말씀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를 통치하고, 통제하는 것이 로마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예수님이 우리를 통치하고 돌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결론
이처럼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이름을 아는 자들은 참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애굽의 포로 된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고 자신을 계시/ 드러내보이셔서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고난당하는 교회, 유혹받는 교회에 삼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셔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에 소망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현재 고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참된 소망과 희망이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오늘 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위로를 누리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영동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