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익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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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용어 중에서 ‘손익계산’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수 자산을 가지고 일정 기간 동안 사업을 해서 나오는 손실과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1억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결산할 때 2억이 되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반면 5천만원만 남았다면 손해를 많이 보았기에 정상적인 사업을 했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사업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사는 주부들도 손익을 아주 철저하고 예민하게 계산을 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아껴 매달 적금을 넣는데, 어느 은행 어느 상품에 넣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되는 것인지 철저하게 알아보고 적금을 넣습니다. 물건 하나를 사도 애플 마트가 싼지, 대백 마트가 싼지 비교해 보고 구입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돈을 벌고 쓰는 것에 있어서만 손익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 속에서도 무엇이 손해이고, 무엇이 이익인지 따져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손해 보는 신앙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을 보는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이라는 엄청난 이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평소 우리의 삶 속에서 얻게 되는 이익과 손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며 가지는 ‘순수 자산’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로 사랑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알게 된 사랑은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나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순수 자산인 사랑으로 이익을 보게 될 수도 있고,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내 마음에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이용해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기 힘들면 하지 말지’라는 생각입니다. ‘용서도 되지 않는 데 어떻게 사랑하냐’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내 시간과 마음, 또는 물질적으로 부담스러우면 포기해 버립니다. 사과 한 번 하면 끝날 일인데 그걸 하지 않아 오랜 시간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손익계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만 손익을 따지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져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별다른 이익이나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희생하며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제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손익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시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하지 않을 때 어떤 손해를 보고, 또 사랑하면 어떤 이익을 보는지 함께 살펴보고 이익을 얻는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얻게 되는 이익에 이런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로써”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을 18절이 말하는 것처럼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면 ‘진리가 우리에게 속한 줄 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마음을 주 앞에서 굳게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굳세게 하다’라는 말에는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진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자신감이 없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불순종 할 때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가책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해서 마음에 가책을 받으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음’이라는 단어를 ‘양심’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읽어도 됩니다.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마음’과 ‘양심’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을 이해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의 양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도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 양심에 찔릴 만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연약하여서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한 스스로가 보기에도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바른 양심을 가졌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 인간의 지각보다 더 깊으시기 때문에, 온전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마음의 가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가책 받지 않는 수준으로 우리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물론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을 볼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는 내 마음을 유지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스스로 보기에 양심의 가책을 받든 받지 않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있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기에 떳떳하게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누리게 될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21절과 22절의 말씀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이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게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니 하나님 앞에서 자신 있게 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와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일을 우리가 행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자녀를 키우신 성도님들 모두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이쁘게 보입니다. 자녀도 어느정도 자신이 부모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해서 무엇이든지 부모에게 와서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것을 줍니다. 때로는 구하지 않은 것도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챙겨줍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사랑하라는 말에 순종한 자녀들이 와서 구하는데 가만히 계시겠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도 없는 자녀가 날마다 엎드려서 ‘하나님 이것 좀 주십시오. 이건 이렇게 해주시면 안됩니까?’라고 기도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과연 들어주실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돈이 아까워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보고도 아무 관심 없이 지나가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깨져버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어서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오래 전 법원의 한 판결 예문의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의 성가대에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시어머니는 눈만 뜨면 새벽 기도에 나가고, 교회에 가서 엎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맞고서 마음에 늘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며느리가 시집을 오면서 혼수를 5500만원을 가지고 와서, 5천만원의 지참금을 시어머니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불만인 것입니다. 조금 더 가져와야 하는데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그것이 늘 불만이다가 어느날 이것이 터졌습니다. 며느리에게 지참금 천만원을 더 가져오라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그리고는 혼수로 가져온 것을 가지고 ‘이건 왜 그렇니’, '저건 또 왜 저렇니’ 라며 며느리를 달달 볶았습니다. 남편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주면 좋겠는데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다니면서 폭력까지 행사한 것입니다. 견디다 못해 며느리가 이혼 소송을 냈습니다.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벌써 다른 큰 교회에 가서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재판 결과가 아주 특이하게 나왔는데, 시어머니가 구박을 해서 살지 못해 이혼하는 경우에는 시어머니도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이 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에 가장 귀중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 어떤 계명이든 다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다른 말씀에 다 순종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전부를 어기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돈은 사랑할 줄 알면서 며느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습니까? 조금만 희생하면 사랑을 베풀 수 있는데 그것이 아까워 사랑하지 않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면 그 손해는 누가 보는 것입니까? 사랑하지 않아 기도가 막히면 그 손해는 누가 보는 것이고, 또 그 손해는 얼마나 큰 것입니까?
손익계산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누림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이익인가? 아니면 사랑하기 싫다고 끝까지 고집 부리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익인가? 신앙생활을 하며 이정도 손익 계산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손익 계산을 잘 하셔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도 누리시고, 그런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도 누리셔서 손해가 아닌 이익을 보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형제를 사랑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은 이익을 얻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은 사랑하는 자녀가 누리는 또다른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둘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아주 친근해 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경상도에 사는 우리에게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앉아 있다고 해도 별 말도 하지 않고 서먹하게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는 그런 부자 관계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그 관계가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 어색하고 서먹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말씀처럼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기도 응답도 받습니다. 이것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기 싫어서 불순종하다가 하나님과 나 사이가 서먹해지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그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손해는 누가 보게 되는 것입니까? 같이 신앙생활하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모두 누리는 그 삶을 나만 누리지 못한다면 그 손해를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손 가정은 ‘부모의 한쪽 또는 양쪽이 죽거나 이혼하여 미성년인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가정’을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인 자녀가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자녀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이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부모와 좋은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가정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결손 가정의 자녀들은 성격이 틀어지고, 생각도 틀어지고, 가치관도 틀어집니다.
우리도 마치 이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체험하는 것에서 신앙생활이 건강해질 수 있는데,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니 병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변함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기에 병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아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손 가정의 자녀와 같은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랑하라고 했는데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놓고는 ‘나는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닥 사랑받는 것 같지 않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가정에서 겉도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니 밖으로 나가게 되고, 거기서 비뚤어지고, 병 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구하고, 무엇이나 얻으며, 주 안에 거하는 행복을 맛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마음에 가책이 되어 마음이 불안해지고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이것만큼 불행한 신앙생활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기세 오 만원 나온 것이 아까워 내지 않고 버티다가 전기가 끊긴 집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기세 오 만원이 아까워 집에 전기가 다 끊긴 채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참 어리석다’,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전기가 끊겨서 생기는 손해는 알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것보다 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기도할 때마다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져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내 안에 거하시는 그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싫어서, 내가 가진 것 조금 나눠 주는 그것이 싫어서, 내 자존심을 꺾기가 그렇게 싫어서 결국 기도 응답 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전기세 아까워 전기가 다 끊어진채로 살아가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손해를 보고 사는 정말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까? 주변에 등 돌리고 오랜 시간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이웃, 직장 동료가 있습니까? 어떤 이유로 서먹해져서 멀어진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아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손해 볼 것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해서 손해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익 계산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손해는 다 내가 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말도 못할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런 손해를 알면서 계속 고집부리며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사랑하기 힘들다면 여러분이 입게 될 손해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부족한 모습이지만 손해 보기 싫어서라도 사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순종하면 좋겠지만 연약한 본성이라 힘들다면, 손해 보기 싫어서라도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며, 기도 응답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든 사랑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누리며 행복한 신앙 생활, 이익이 가득한 신앙 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