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수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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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09(목마른 내영혼) 294(하나님은 외아들을) 503(세상 모두 사랑 없어)
본문 골3:12-14 (신p.327)
제목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
하나님 감사합니다. 도무지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연약하여 쉽게 넘어지고 실패함에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심에도 감사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과 존귀와 찬송 받아주옵소서. 지난 삼일동안 지켜주심에 감사하여 이 시간 삼일밤예배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높여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끝까지 우릴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의 말씀 들으며, 주님께 간구하는 이 한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광고]

하반기 구약 성경통독반을 시작합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90일간 진행됩니다. 아직 신청 못하신 분들은 사무실에서 신청해주시길 바라며, 성경 통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행11:26 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이라는 의미이다.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예수믿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단어는 본래 멸시와 경멸의 뉘앙스로 처음 사용되었으나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하면서 이 호칭이 얼마나 우리에게 영광스러운지를 강조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른 의미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등장한다. 12절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고' 먼저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을 비롯하여 오늘 동일한 말씀을 받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거룩한 자들’ 이 3가지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이는 삼위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여주는데, 영원 전부터, 이 땅을 지으시기도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자들이고, 그들을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내어주셨으며, 성부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성자께서는 자기 몸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사랑하셨으며, 오직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복음을 믿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들을 얻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들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인,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요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뭔가 구원의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럴만한 고귀한 혈통을 갖추었거나, 그럴만한 재물이나 재산이 있다거나, 내가 뭔가 하나님께 사랑받을만한 어떤 공로를 행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죄로 물들고 죄로 부패한 내 안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은혜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오직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주인이 혼인잔치를 배설하며 이에 두루 다니며 잔치에 많은 사람들을 초청한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자기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시간이 되어 잔치는 임박했다. 이에 주인은 종들을 보내며 잔치의 빈자리를 채우도록 더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게 된다. 잔치가 시작되고 주인이 잔치를 둘러보니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는게 아닌가? 주인은 매우 분노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잔치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여러분, 초청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잔치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똑같이 초청받은 무리였다. 아무런 구별이 없다. 그런데 뭔가 차이를 만들어냈다. 이 차이를 만들어낸 이유가 무엇인가? 예복이다. 예복을 입은 자들은 잔치에 들어갔고,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쫓겨났다. 이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이루신 ‘의’ 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이루신 의를 전가받는다.
나란 사람을 보면 어떠한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 나아보이는 점이 없다. 그들과 비교할 때 선행을 행한 것도 없다. 오히려 더 추악하고 더럽고 불결한 모습들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과 차이가 발생한다. 왜냐? 영원 전부터 성부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의를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얻으셨고, 성령께서 이를 믿음으로 나에게 적용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죄인이지만 내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판결을 받는 것이다. 나는 영원형벌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옷은 내가 만들 수 있는 옷이 아니다. 내가 이룰 수 있는 옷도 아니다. 그래서 이 옷은 예수님의 옷이다. 우리가 믿음으로서 선물 받은 옷이다. 12절 후반부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고' 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 성품들이 예수님의 성품이다. 즉 삼위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 답게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새 옷 입은 자 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옷 입은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

[새 옷 입은 자의 특징 #1. 형제를 용서하는 삶]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 첫번째는 형제를 용서하는 삶이다. 13절의 시작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으로 시작한다. 한글성경에서는 ‘불만'으로 번역하였지만 원어로 보면 ‘비난, 힐난' 과 같은 강한 어조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주 친근한 사이에서도 불만을 품기 쉽다. 뭔가 내가 기대하는 만큼 나에게 해주지 않거나, 나에게 불친절하거나,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불만을 품는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품은 불만의 씨앗들이 장차 자라나서 상대를 향한 비난과 조소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가질 때마다 이를 겉으로 표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공동체는 금방 와해되고 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겉으로만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감정들을 억누르고 삭히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 감정들은 계속해서 쌓여갈 것이고, 언젠가는 가득차서 폭팔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감정폭팔 그 위기의 순간에 잠시 참아내고 인내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그때만 효과가 있는 것이지 궁극적인 해결책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말씀한다.
먼저 ‘용납하다’ 라고 번역된 원어는 ‘견디다’ 라는 의미이다. 형제들이 나에게 잘못한 일들이 있고, 나에게 손해와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하여도, 그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견뎌내라는 것이다. 또한 ‘용서하라’고 번역된 원어의 의미는 ‘빚을 면제해주다, 은혜를 수여하다’라는 의미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빚을 탕감받은 것처럼, 셀수 조차 없이 수많은 죄를 찍어내고 있는 죄악의 공장과 같은 나 자신이지만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의 연약함을 견뎌주고 죄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일반적으로 ‘교회’를 떠올리면 뭔가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곳 같고, 이 곳에 오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쉼을 누리고 홀가분해질 것 같지만 실상은 교회 역시도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부정과 부패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온갖 죄악들이 양산될 수 있으며,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차별과 분열과 당파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 앞에 선 저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누군가 피해를 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누군가 갑질을 했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갑질을 당했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감정적인 공격을 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괴로웠을 수 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세상의 동호회나 친목단체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떠나면 그만이다.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교제와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내가 손해를 입더라도, 내가 피해를 입더라도,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더라도, 내가 누군가로 인해 괴로울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삼위하나님으로부터 측량할 수 없는 빚을 은혜로서 탕감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자라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작고 사소한 빚을 진 형제들을 나 역시 주님의 은혜로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내가 입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만달란트 비유에서도 기록되어 있지만, 백 데나리온이라 하면 오늘날로 돈 천만원 정도 되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큰 돈이고 정말 필요한 돈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다른 형제들로부터 받는 상처, 괴로움, 아픔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뒤흔들만큼 아픈 문제이기도 하고, 실족하여 넘어질만큼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토록 내가 받은 상처가 아프고, 내가 입은 피해가 막심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죄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내 양옆의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으셨는가? 어느 성도가 나를 괴롭게 만드는가? 그 성도로 인하여 때로 물질적인 손해도 입고, 마음에 큰 상처도 입으셨는가? 그럴지라도 주께서 나의 죄를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을 기억하여 그 형제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라. 형제의 연약함에 대해 인내해주고, 오래 참아주라. 때로 형제가 나에게 악을 행하더라도 그를 가슴으로 품어주고 그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임을 기억하여 늘 형제를 품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이것이 너무 감당하기 벅차거든 주께서 우리게 어떤 사랑을 보이셨는지를 먼저 기억하라. 정말 쉽지 않지만, 정말 벅차지만, 이 보다 더 큰 죄를 범한 우리를 참아주시고 용납하신 삼위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와 한 몸 되게 하신 형제들을 늘 품어주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새 옷 입은 자의 특징 #2.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 두번째로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이다. 14절 말씀을 보라. 여기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모든 것'은 12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입게 된 새 옷, 곧 그리스도의 성품인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 그리고 13절에서 ‘용서’까지 포함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삼위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용서의 삶의 자세들을 취하여 살아가야 할 것인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한다.
생각해 보라.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를 할 때, 사랑이 없는 용서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할 수 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용서해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몇 주 전에 장을 보러 마트를 갔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장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누가 차를 빼다가 제 차를 박았으니 빨리 와서 한번 봐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큰일 난 줄 알고 장보다 말고 허겁지겁 나가 확인해보니 차 앞 범퍼에 살짝 기스가 갔더라. 워낙 험하게 타던 차이기도 했고, 크게 파손된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괜찮으니 가시라고 했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만난 적도 없고 연락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다. 단 한번도 교제한 적이 없지만, 그분을 용서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이런 용서의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 용서는 두 당사자 간에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도 없고, 사랑도 없는 용서이다. 별 문제 아니니 용서한 것이다. 더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용서한 것이다. 내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굳이 이 일에 ‘사랑’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대상자들은 서로간에 아무런 인격적 교제가 없는 남남이 아니라 한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요, 성자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들이며,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되게 하신 한 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14절을 통해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 ‘아가페’사랑이다. 이는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은 먼저 그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목표로 두고 달려가야 할 가장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한다. 이 모든 덕 위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들을 다 가진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 없어도 긍휼히 구제사업을 할 수 있고, 사랑이 없어도 겸손할 수 있으며, 사랑이 없어도 온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 없는 모든 선행이나 사랑이 없는 덕은 그 선행을 받는 사람에겐 약간의 유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 없이 그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저 울리는 꽹가리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이윽고 다툼으로 이어졌고, 서로를 향한 비난과 조소로 이어졌다. 그러다 한 사람이 그 불편한 관계가 싫기도 하고 그 원수같던 상대도 꼴보기 싫어서 건성으로 ‘미안하다’ 한 마디 해버리고 교회를 떠나버리거나, 혹 교회 안에서 마주치더라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교제를 끊어버렸다면,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인 가? 사랑이 없는 용서, 사랑이 없는 선행은 나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특별히 본문에서 이 사랑을 가리켜 우리 개개인을 하나로서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나라 한복에 ‘고름’ 이라는 것이 있다. 활복이나 평상복이나 남성복이나 여성복이나 전통 한복에는 고름이 있다. 옷 고름은 옷을 잡아주고 흘러내리거나 벗겨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당시 이스라엘에도 옷을 입을때 가장 마지막에 옷을 몸에 딱 밀착시키기 위해 둘러서 묶는 용도로 띠를 매었다. 모든 옷 위에 띠를 매어야만 비로소 옷이 완전해진다. 바울이 말하는 ‘매는 띠’가 바로 이것이다.
생각해보라. 출생지역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관심사도 전부 다 다른 저와 여러분 모두를 주의 몸된 양문교회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하게 묶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 양문교회 뿐만 아니라 충주지역에 모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와 같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로 묶여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사랑 안에서 한데 묶여 있고, 더 나아가 세계 도처에 흩어진 주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 백성들을 한 몸으로, 그 신비한 하나의 연합으로 모으사 하나로 연합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끈이다.
하나님께서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고 모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묶으셨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모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서로를 섬기며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되, 이 모든 덕목들을 사랑으로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마치 띠와 같아서 다른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있도록 해준다. ‘온전하게 매는 띠'란 문자적으로 ‘완전함의 띠’로서, 사랑 만이 모든 은사와 섬김과 봉사와 경건과 덕목들을 완전한 조화 가운데 하나로 묶어준다.
우리 이 시간 앞뒤 양옆의 성도들을 한번 보라. 지금 여러분들이 바라보고 계시는 분들은 내가 밟아 넘어서야 할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할 대상도 아니다. 미워하거나 시기질투해야 할 관계도 아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되어 주님의 거룩하신 몸을 이루고 있는 한 지체이다. 주님의 거룩하신 한 몸됨을 위하여 우리는 더욱 사랑으로 우리를 동여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모든 관계들을 주께서 몸소 보이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묶으라. 여러분의 모든 섬김과 헌신을 주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동여매라. 여러분이 받은 은사와 덕목들도 주께서 몸소 보이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묶으라. 그 사랑만이 우리를 완전한 조화 가운데 하나로 묶어주실 것이다.

[결론]

결론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영광스러운 호칭,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워질 수 있게 되었는가? 이 땅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부터, 시간이라는 개념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시작된 삼위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내게서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으시고 오직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기초하여 먼저 베푸신 그 사랑 때문이다. 택하시고 사랑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인 답게’ 이 세상을 갈아가야 한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형제를 용서하는 삶,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이었다. 이 2가지는 결국 하나의 주제를 드러낸다. 바로 ‘사랑’이다. 바울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하셨다. 여기서 ‘힘쓰다’라는 단어는 ‘끙' 하면서 힘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 여기에 쏟아 붓는 정도를 의미한다. 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데에 우리는 사력을 다해야 하는가? 이 일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세가 다가올수록 불법이 성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을 경고하셨다.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섬김과 헌신과 봉사와 은사들에 주께서 보이신 사랑으로 꽉 동여매지 않는다면 언제든 쪼개지고 분열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 삼위하나님께서 먼저 보이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영혼들, 우리와 한 몸되게 하신 형제들을 힘써 사랑하자. 하나님이 몸소 보여주신 그 사랑의 수준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가자.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 만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고, 사랑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며, 사랑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 합심하여 기도하자.
주여, 나에게 참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의 사랑을 부어 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주의 사랑을 가득 채워 주옵소서. 주의 사랑 외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직 주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주의 사랑만이 더욱 필요합니다.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세워질 수 있도록, 더욱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영혼들을 오래참고 용납하며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의 하나됨을 위하여, 우리의 교회됨을 위하여 오직 주의 사랑만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이시간 이러한 제목으로 함께 ‘주여’ 한번 외치며 기도하자.

[찬422 거룩하게 하소서]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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