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복있는사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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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20 (NKRV)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들어가며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10여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엘 오스틴 목사를 아십니까? 긍정의 힘, 잘되는 나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의 책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정적인 것들을 우리는 마음껏 누릴 필요가 있고 하나님은 정말로 멋지신 분이고, 우리도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어디서나 세련되고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면 자연스럽게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분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회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분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죄라는 것, 회개라는 것은 부정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버려야할 것,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 자꾸 떠올려봐야 좋지 못한 것입니다.
아까부터 제가 ‘조엘 오스틴 목사님’ 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분’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실 많은 분들이 이분을 이단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에 일부러 저도 '이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류응렬 교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전혀 지적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하나님 만을 강조하는 반쪽 복음(sub-gospel)이 아니라 반 복음(anti-gospel)에 가깝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아예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 조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반대하는, 이단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결국에 죄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성경은 확실하게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12절 말씀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9절에 “우리는 나으냐”라고 물으면서 “결코 아니라”고 자문자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는 사도 바울도, 로마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알고 말씀을 받았던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도, 또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이라 할지라도… 결코 괜찮지 않음을, 결코 낫지 않음을,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보여주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200일 성경 통독 다들 하고 계시지요? 저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읽으면서 너무 큰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도 이곳저곳에서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습니까? 성경에 잘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은혜를 누립니까? 부자 이야기, 긍정적인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가 가득해서 우리가 은혜를 경험합니까? 물론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혜라기 보단 교훈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해봐야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를 받는 부분은 이런 부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모습에서, 다윗 왕의 실수, 많은 왕들의 위선과 탈선들 속에서 은혜를 누립니다. 그들의 잘못 그 자체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수와 잘못, 죄악 속에서도 강렬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 변함 없으신 사랑, 신실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죄인임을, 모두가 죄인임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깜빡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으냐’의 ‘우리’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치면, 1인칭 복수형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아니라 ‘너희’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제외시켰다면 ‘우리는 나으냐’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나으냐’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죄 아래에 놓여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은 다른 죄인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할 사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용서 받은 죄인이라면, 연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그 또한 용서를 받은, 혹은 용서를 받을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양상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어서 13절에서 17절에는 ‘죄의 양상’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13, 14절은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라고 하면서 언어와 관련된 죄를 지적하고 있고, 15절에서 17절까지는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라고 하면서 ‘발’, ‘길’과 같은 단어를 통해서 움직임, 즉 행위와 관련된 죄를 언뜻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의 죄는 ‘말’과 ‘행동’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말’과 관련된 죄악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짓는 죄의 경우는 보통 우리가 잘 이해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흔히 ‘범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행동과 결부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말’도 죄가 드러나는 양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말로 범하는 죄’를 짓고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들을 상처주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합니다. 속담에도 ‘말과 언행’에 대한 속담이 많은 것을 볼 때,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실감케 합니다. 이런 위력을 가진 ‘말’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기 보다 위로하고, 무시하기 보다 세워주고 격려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입술을 조심합시다. 우리의 혀를 조심합시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나가며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정말로 주님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처절하게 느끼므로, 감사와 감격이 충만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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