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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2:1-7

앞의 제 11장은 사사 입다의 등장과 그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이어 지는 본장의 전반부 제 1 -7절은 입다가 속한 길르앗 족속과 에브라임 지파와의 내전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에브라임 지파를 가리키는 ‘에프라임’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 ‘에프라 트 (n,~~)’ 의 남성형 쌍수로서 ‘두 배의 과실’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브라임' 은 원래 요셉 의 두 아들 중 차남의 이름으로서 요셉이 애굽에서 당하던 모든 고생 끝에 창성하게 된 것을 하나 님께 감사하며 지었던 이름이다(창 41 :52). 에브라임 지파는 가나안 땅 정복을 주도한 위대한 지 도자 여호수아를 배출했던 지파로서(민 13:8 , 16) , 이스라엘 내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 다. 그런데 막상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길르앗 출신 입다가 암몬 자손을 물리치자 시기심이 생겨나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처럼 (8: 1, 2) , 입다가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또 다시 입다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하고 무례한 태도가 화근이 되어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 42,000명이나 되는 에브라임 사람이 죽는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12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여기 1절에서 ‘집'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입다에게 있어서 ‘집'은 단순한 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집'을 의미하는 ‘빠이트' (베들레헴) 는 외형적으로 ‘house’와 같이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구성물을 뜻하지만 내적으로는 ‘home’ ‘family’와 같이 가정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가족과 식구들, 그리고 지나온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 ‘집'을 불태운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입다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삶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모욕적인 협박으로서 입다를 분명히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브라임 지파가 왜 입다에게 이처럼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겠는가? 기드온이 미디안 과의 전쟁에서 독자적으로 승리한 이후에도 에브라임 지파는 그에게 심한 불평을 했지만 입다의 경우와 같이 이처럼 도발적으로 대하지는 않았었다 (8: 1). 그러나 입다가 기생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고, 길르앗은 에브라임 곧 자기 지파에서 도망나온 자들이라고 여겼던 (4절) 에브라입 지파는 이처럼 적대적인 표현을 통해 입다와 길르앗에 대한 멸시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이와 같은 모욕적인 발언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입다와 길르앗 족속으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궐기하게끔 만들었다.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내가...부르되'에 해당하는 동사는 ‘자아크'는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울면서 부르짖는 의성어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그냥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카라'보다 훨씬 더 애절하게 도움을 구하는 심정으로 부르짖는 것을 나타낸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34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입다가 암몬과 싸울 때 에브라임을 부르는 행동으로 ‘카라'가 아닌 ‘자아크'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에브라임의 도움을 얼마나 절실히 요청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오히려 부르짖음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에브라임 지파가 이제 와서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처음과 다른 입장을 보이며 노골적인 멸시감을 담은 협박까지 하고 있는 것이 입다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에브라임이 길르앗 사람들을 그렇게 ‘도망자'라고 부른 것은 길르앗 사람들에게 부당하고 몹시 모욕적인 언사였다. 길르앗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도망친 무리들이 아니라, 므낫세 지파의 한 분파인 마길의 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르앗은 분명히 야곱의 12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족속인데, 에브라임은 길르앗이 자기 지파에서 도망쳐 나감으로써 이스라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 정치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난은 단순히 비겁한 도망자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길르앗 족속의 정통성 자체를 짓밟아 결국 그들을 언약 백성의 반열에서 제외시키는 결론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매우 독선적이며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원어 성경으로 볼 때 4절에 나오는 ‘본래...도망한 자로서'로 번역된 ‘펠리테'와 일치한다. 본문은 성경의 수사학적 표현의 탁월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을 ‘도망한 자'라고 비아냥거렸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들로 인해 ‘도망하는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입다의 군대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심으로 길르앗은 에브라임으로부터 도망한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셨고, 그와 같이 근거 없는 비난을 한 에브라임을 오히려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시키셨다.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히브리어에는 우리말의 ‘ㅅ'에 해당하는 발음으로, ‘싸메크' ‘신' ‘쉰'등이 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쉬'를 ‘쓰'로 발음했던 모양이다.
예화 ) 경상도 ‘ㅆ' 발음 장애 (소싸움, 쌀소득)
당시 살륙이 어느 정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는지는 42,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광야에서 마지막 인구 조사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이 32,000명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숫자는 당시 전쟁에 나올 수 있는 장정들은 거의 다 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브라임과 입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레슨이 있습니다.
특권 의식은 다툼과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지파 중 소위 명문 지파였습니다. 요셉, 여호수아 다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특권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권 의식에 물들어 있는 자는 공동체의 유익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의 지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정작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뒷짐지고 있다가 나중에 공적만 차지하고자 했던 에브라임 지파처럼, 우리 주위에도 공동체를 위해서는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그 안에서 존경과 지위만을 차지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높임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서로를 높여주고 먼저 존경하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가 분노가 되게 하면 안됩니다. 물론 먼저 싸움의 실마리를 제공한 측은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입다의 처신이 전부 옳았던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좀더 지혜롭게 대처하였더라면 동족간의 싸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기드온의 때에도 있었는데, 그때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고 말하며 시비를 피했습니다 (8:2).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지혜로운 말 한마디로 상대의 분을 삭이고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에게는 기생의 아들로서, 집에서 쫓겨난 상처가 있습니다. 길르앗 족속까지 배신자 취급합니다. 상처가 분명히 있었고 에브라임은 그 상처를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에게는 그 상처가 사명으로 변하기보다는 여전히 분노로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입다가 잘못한 것 없어보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원수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는 용서의 깊이와 넓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결국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방법이 됩니다.
싸움의 대상을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에브라임과 길르앗이 힘을 합쳐서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나라들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동족이 죽음으로써 분명히 대적들에게 이스라엘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도 싸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그의 몸이 아닙니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그의 통치를 받는 그의 자녀와 백성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주도권 때문에 교단과 교단, 교회와 교회, 목사와 장로, 성도들 사이에 서로 다투고 분열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바로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이며 불의의 세력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대적 사단마귀만 좋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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