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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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본문은 먼저 물질과 관련해서 제자가 취하여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물질이 있을때(19-23절)와 물질이 없을 때(23-34절)의 두 상황에 비추어 교훈해 준다.
먼저 19-23절은 제자가 보화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 보화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교훈합니다. 앞서 나온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한 내용에서 하늘의 상과 이 땅의 상에 대한 대조는 자연스럽게 이 땅과 하늘의 보화를 대조하는 말씀으로 이끕니다. 하늘의 보화는 어떻게 쌓아져 가는가? 우리의 신앙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갈때 쌓여집니다. 이 보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을 위한 보상입니다. 이는 그 보화가 우리에게 줄 수있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은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어떠한 영원한 안전이나 만족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그 돈을 사용함으로 얻고자 하는 최종 목표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통해서 안전감, 만족감, 행복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넘어서서 돈이 곧 안전이고 돈이 곧 행복이고 돈이 곧 모든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목표들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없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늘의 보화와 땅의 보화를 비교하십니다. 여기서 관심이 있는것은 제자들의 부가 아니라 삶에 있어서의 중심입니다. 어느 것을 삶의 중심으로 놓고 살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조금은 뜬금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눈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눈 즉 바라보는것의 효력은 얼마나 성한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성한지에 라는 단어는 하플루스라는 단어로 육체와 관련해서는 건강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윤리적으로 사용될 때는 단일한,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시선이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성한 눈의 결과는 온 몸을 밝혀주는 것이 된다. 여기서 몸은 사람의 전 인격을 나타낸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만일 등불이라는 개념이 사람의 몸으로 하여금 그 길을 찾게 해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 구절이 드러내주는 것은 목적있는 인생, 즉 진정한 목표를 향하여 있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통해서 24절의 원칙이 나온다.
재물을 획득하였을 때 그것을 땅에 두는 데만 관심이 있는 자는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이다. 하지만 재물을 획득하였을 때 그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고, 그 뜻에 따라 사용하는 자는 하난미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자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재물이 목적이 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사는 것을 목적으로 두는 사람을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이어서 25절부터는 제자에게 물질이 없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한다. 재물의 위험성은 재물이 제자의 충성심을 요구하게 된다는데 있다. 그리고 중심 주제는 염려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부자 관계에 기초하여 제시하신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제자는 물질과 관련하여 걱정대신 그분의 돌보심과 공급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우리의 목숨과 몸을 이야기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는 말로써 목숨과 몸을 즉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신 하나님이 시라면 덜 중요한 것들을 당연히 제공해 주시리라고 신뢰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음식과 관련해서는 새의 경우를 들어, 옷과 관련해서는 들꽃의 경우를 들어, 이러한 신뢰의 타당성을 설명하신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26절과 28-30절은 제자란 일을 안 해도 먹고 살수 있다는 식의 낙천주의를 그리고 27절은 제자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식의 운명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제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나 들꽃보다 훨씬 더 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을 뿐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점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은 새들이나 들꽃보다 훨씬 더 귀하다. 제자들은 일하는데 새들과 들꽃들은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새들과 들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일하는 제자들을 먹이시리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는 제자들은 먹는 문제로 걱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일을 안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금하시는 것은 걱정이지 일이 아니다.
물질적 필요 때문에 걱정하고 , 그 필요를 채우는데 모든 관심을 빼앗기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특징이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게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공급해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것들로 보이는 물질적 필요때문에 걱정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목표를 그 필요들을 채우는 데 둔다. 하지만 제자는 그러한 걱정과 삶의 목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이신 것을 아는 제자는 그분께서 자기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고 물질의 풍족함에서 안전감을 누리는 자들은 물질이 있을때는 그것을 쌓아두고 물질이 없을때는 걱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통치감에 안전감을 누리는 자들은 물질이 있을때는 그것을 필요한 자들과 나누고 물질이 없을때는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
예수님은 제자가 물질적 필요로 인한 걱정 대신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구해야 할 목표를 결론적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염려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이런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태도가 없다면 필연적으로 염려하게 되어있다. 제자들의 최우선적 추구 대상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 이어야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왕권 또는 그분의 왕적 통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받는 결과,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최우선적으로 구하는 제자들에게 는 이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모든 것들은 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께서 아시는 제자들의 기본적인 필요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원하는 모든것을 제공해 주신다는 백지 수표가 아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아버지께서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제공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삶은 결코 피동적이거나 나태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자신의 삶과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제자의 삶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삶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뿐 아니라 ,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자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는 방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야하며, 이는 대개 제자들의 더 많은 수고를 요청하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다. 예수님 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적극적인 삶의 목표를 제시하시고, 그러한 삶을 사는 제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물질적 필요들을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우시리라는 사실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사태평할 것이다라는 약속은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34절이 시사해 준다.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는 제자로서 제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적 괴로움과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까지도 미리 예견하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한 고통의 문제 역시 하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며, 그 해결책 역시 아버지의 손 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동안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팔이 짧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이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한 순간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