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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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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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로마 황제 숭배]
오늘 설교 제목인 ‘퀴리오스’는 그리스어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 황제는 자신을 ‘퀴리오스’라고 부르며 신처럼 숭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종교은 그대로 가지되 로마 황제인 자신 또한 신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자신들의 주님이셨고, 퀴리오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그렇게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성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비록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들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1. 유다의 상황
오늘 본문 1-2절은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겨 착복하고,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탐욕을 따라 행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3년간 섬기다가 배반하게 되죠. 그러나 그의 악행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패배하여 잡혀가게 됩니다.
바벨론은 여호야김뿐만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을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즉 포로로 잡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전에 사용되는 기구들도 빼앗아 갑니다. 이는 고대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패배한 신 또한 승리자의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유다인들에게 참으로 끔찍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나라는 망해 가고 있고, 더 이상 이전의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도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주변 이웃, 친구, 그리고 가족과의 단절이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의 기초학력은 계속해서 떨어져 가고 있고, 이기주의로 인한 사회 문제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도 역시 동일하게 겪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예배할 수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 때 수련회에 가면 꼭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때 옆 사람을 위해, 그리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 함께 기도했는데, 그때의 기도는 너무나도 은혜롭고 힘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라는 상황이 우리의 일상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위기의 상황
일상을 빼앗긴 유다 백성들 앞에 바벨론 왕은 한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3-5절에 나와 있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종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먼저 왕족과 귀족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와 지식을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뽑습니다. 왜 바벨론 왕은 이러한 소년들을 뽑았을까요?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한 영재라 할지라도 모든 지식과 경험이 많은 성인을 종으로 삼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했는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질 때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물이든 사람이든 흠이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또한 ‘소년(엘레드)’이라는 조건은 아직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를 뜻합니다. 잠언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지혜를 교육합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어린 소년들입니다. 이 소년들은 아직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런 아들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며, 그들이 다 자란 후에 여호와 하나님만을 선택하길 원했습니다. 즉 ‘소년’이란 아직 누군가를 섬기고 헌신 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바벨론 왕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벨론 왕은 선별된 소년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칩니다. 바벨론 학문이란 바벨론의 사상과 세계관을 말합니다. 어린 소년들에게 바벨론 사상과 세계관을 가르쳐 바벨론 신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신들의 아들인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했는데요, 이것은 왕과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왕의 종속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의 친척 중에 강아지를 키우는 친척이 있습니다. 그곳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처음에는 강아지가 주인만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간식을 계속 주니깐 어느 순간 강아지는 저에게 계속 왔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왕은 평생 자신이 주는 양식으로 길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이 일의 기한을 3년으로 정합니다. 이는 3년이면 충분히 바벨론 사람으로, 충성스러운 자신의 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 왕은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 나라를 망했고, 더 이상 너희가 섬기는 신은 너희를 도와줄 수 없어! 지금 너희 상황을 봐! 이 상황에 내가 주는 답이 정답이야! 나를 섬겨! 그러면 내가 너희의 일상을 돌려 줄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과 오버랩 됩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후 어디에서 시험을 받습니까?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셨기에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먹을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돌과 바위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탄은 매우 예리하고 합리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깐 내가 말하는 답을 선택해야 돼! 이것 밖에 답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탄이 주는 답을 거절하십니다. 상황이 원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답을 선택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답을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관심사나 대학 전공과는 상관없이 취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취업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깐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눈을 돌려 무리한 투기를 하는 청년들도 또한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상황이 주는 답을 우리는 선택하고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이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답,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행복인 줄 믿습니다.
3. 우리의 상황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모습도 한번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모습인지, 아니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한 모습인지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누구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누구를 나의 주인, 나의 퀴리오스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퀴리오스는 누구입니까?
오늘 누군가는 이 설교 말씀을 듣고 저에게 “현실을 보세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황만 잘 넘기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면 되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대학원 학업 중에 있습니다. 지금 2학기 중인데, 원래는 월요일마다 용인 양지에 있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처음 수업을 하기 전에 여러 목사님들은 현장 수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수업하는 것이 질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학기가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설문조사를 해보니, 모두 온라인으로 계속하자고 답변했습니다. 온라인으로 하니깐 교통비도 들지 않고 시간도 절약되며, 무엇보다 편하니 그냥 이렇게 계속 진행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니다.] 학업도 이런데, 예배은 어떨까요?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길들여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많은 교회들이 세상이 주는 답을 따라 살아갑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와 바벨론 왕이 요구하는 답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왕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렇게 길들여져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자세히 보길 바랍니다. 그들 가운데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벨론에 살아갑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름에서 우상들을 찬양하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유다 자손이라 부르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그들은 바벨론 왕이 제시하는 답을 거부합니다. 바벨론 왕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에 주목하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3:16-17).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답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칼빈의 고백처럼 말씀이 가라고 하는데 까지 가야 하고, 말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 생각과 내 판단,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으로 인해 결정하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를 실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지 말지 생각하고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답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는 이 때에, 세상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주님의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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