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2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한 수도사가 외진곳에서 백일 작정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그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 졸개들을 시켜 작정 기도를 방해하려고 온갖 방법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마침내 식욕과 성욕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도사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장 사탄이 직접 나섰습니다.
사탄은 그의 친구로 위장하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몇마디 말을 했는데 수도사는 벌컥 화를 내며 보따리를 싸고 그곳을 떠나버렸습니다.
후에 사탄의 졸개들이 ‘대장님,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수도사가 금새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까?’라고 묻자 사탄은 낄낄거리며 말했습니다.
"음~자기 어린 동생이 이번에 주교로 임명됐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 수도사는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고 달려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가지는 이겼다고 생각되더라도 또다른 욕망에 져서 죄를 짓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 나는 예수님 믿고 났더니 죄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분 있나요?
그럼 그 사람은 벌써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민되는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나서도 여전히 내 죄때문에 정죄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 역시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지만 삶에 있어 여러가지 죄악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19절 보십시오.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음, 다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 등등
대략 15개입니다.
이걸 좀 분류하자면 음행, 더러움, 방탕은 성적인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 마술은 종교적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파당, 질투는 모두 관계적인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관계적인 죄가 제일 많이 표현된 것을 보면 교회 안에서 자주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은 무절제한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게 다가 아니지만 대략 이정도만 소개했다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이걸 보면 거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 아닌가요?
[증명]
그럼 도대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영어로 굿뉴스입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자녀가 되면 끝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 몇몇 성도들은 복음을 듣고나서도 여전히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적용]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교회 다닌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 짓는 죄 똑같이 짓거든요.
안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크리스천들의 위선적인 삶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분당에 있는 한 대형교회를 방문했는데 너무 많은 차가 학교 앞을 막고 있는거에요.
거기는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거든요.
교회 예배 드리겠다고 도로 한쪽을 완전히 막아버리니 교회 안가는 사람들 차량도 그 도로를 지나갈 수가 없게 된거죠.
그러니까 빵빵거리면서 안 믿는 분이 욕하고 난리더라구요.
자기 신앙생활하기 위해 남들에게 이렇게 피해줘도 되느냐는 거죠.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과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올해 통계를 보니까 안믿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3.6퍼센트입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거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인들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정치인들이 모인 국회의 신뢰도가 13퍼센트입니다.
이건 국회, 언론, 정부 다 합쳐서 신뢰도 꼴찌 수준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크리스천들을 신뢰하지 않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온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통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짓자 거짓 성경교사들은 그 해법으로 율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너희들이 들은 복음이 부족해서 그런거니까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행위들을 잘 지켜나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간음하지 마라, 술취하지 마라, 우상숭배 하지 마라 이런 명령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13가지나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너희들이 들었던 복음에 뭔가 문제가 있거나 부족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너희들이 들었던 그 복음 자체에 해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요구가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서 두 요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13권 이상 쓴 사도바울 조차도 이 문제로 큰 고민을 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이게 우리 역시 죄를 저지를 때 겪는 갈등 아닌가요?
죄인줄 알지만 그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육체적 욕망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을 지라도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들을 완전히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 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나쁜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 나쁜 생각이 죄를 짓지 않게는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고 성령의 요구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석]
너무 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성령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의 변화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증명]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같은 경우 예수님 믿기 전보다 예수님 믿은 후 죄를 저지르는 게 현격하게 줄었습니다.
이건 당연한거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를 저질러도 죄책감이 별로 없었어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다 짓는 죄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 믿고 났더니 죄는 훨씬 적게 짓는데 죄책감은 더 커진거에요.
다른 사람들도 짓는 죄이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죄책감을 갖게 된 겁니다.
이것을 보면 내 안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성령을 한자어로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helper, counselor, encourager 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그 분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해석]
이렇게 먼저 성령의 존재를 믿고, 다음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16절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살아가십시오’라는 헬라어 단어가 ‘함께 걸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보통 함께 걸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가까운 사람입니다.
성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증명]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단어 때문에 성령을 마치 밧데리 충전하듯이 힘이나 에너지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어떤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매우 인격적인 분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의미는 내 뜻을 꺾고 그 분의 지배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님께 맡겨드릴 때 그 분의 인격적인 지배를 받게 됩니다.
저도 브루스를 제대로 춰본 적은 없는데 정말 브루스를 잘 추는 분이 있으면 그 분께 자기 몸을 맡기면 된다고 합니다.
내 몸을 맡기면 그 분의 움직임에 내가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치 내 몸이 아름다운 브루스를 음악에 맞춰 추는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적용]
물론 말은 쉽지만 여전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브루스 출 때도 파트너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 자꾸 몸에 힘을 주면 스텝이 꼬이고 춤이 망가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뜻대로 하고 싶을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예전에 신학교에 예쁜 여학생 한명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 신학생들이 너도 나도 그 여학생에게 댓쉬를 했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여학생은 한 명인데 여러 명의 남학생들에게 댓쉬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다는 신학생들조차도 자기 욕망 앞에서 하나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다는 것은 한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평생을 걸쳐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망을 거슬러 성령의 요구를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에 우리의 몸을 맡기게 될 때 우리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22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는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해석]
이 모든 인격적 특성들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닮아간다는 말은 이런 성품들이 우리 인격에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문장을 원래 성경이 쓰인 언어인 헬라어로 보면 동사가 단수라는 것입니다.
9가지를 말했기 때문에 복수로 나타나야 문법적으로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왜 단수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원래 한가지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9가지 모두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오락실에 있는 두더지 놀이 하듯 기쁨은 잡았는데 인내가 도망치고, 친절은 잡았는데 절제가 도망치고…
이런 일의 반복이 된다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이런 식으로 맺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이런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이 모든 성품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뿌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마치 고구마 뿌리 하나에 고구마들이 연결되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성품들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열매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열매들은 작게 열리기도 하겠지만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이런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성령이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고 성령의 요구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육체적 욕망을 절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욕망은 정말 오락실 두더지 게임같아서 하나 잡으면 또다시 다른 것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이 결코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라, ~하지 마라’ 이렇게 정해놓는다고 해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을 행할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죠.
제가 예수님 믿은 지 얼마 안될 때였는데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했습니다.
텔레비전 코드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면 안보게 될 줄 알았죠.
그런데 그렇게 안되더라구요.
일주일만 지나니까 그 코드 자른게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 붙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더라구요.
예전에 담배 피울 때도 그랬습니다.
담배 피우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피우게 되더라구요.
화장실에서 몰래 피우고, 교회 사람들 없는 곳에서 몰래 피우더라구요.
언제 담배가 끊어졌을까요?
주님을 더욱 알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끊어지더라구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규율과 통제같은 종교의 율법으로 욕망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럼 야생마처럼 날뛰어 결코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육체적 욕망이 통제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24절이 이것을 잘 말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앞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하면’ 이라는 말은 계속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우리의 육체적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 그리 어마어마한 일이 아닙니다.
인류를 구원할 어떤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26절을 보시면 삶에서 잘난 체 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한 주동안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성령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