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사인생이냐, 닛시인생이냐

출애굽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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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러분은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집니다.
대통령의 서재에 뽑힌 ‘광야를 읽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이 올라가지 않은 산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사실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보다 광야를 지나는 것과 더 많이 닮았다. 결혼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직장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처럼 광야를 지나는 것이 인생인데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처럼 등산화를 신고 로프를 들고 있다. 인생에서 광야가 더 많이 펼쳐져 있음을 안다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 것이다. 더 빨리 올라가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광야인줄 모르고 산을 오르는 것처럼 살고 있기에 힘들고 지치고 낙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광야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광야 생존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번째 문제는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또다시 마실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르비딤에 도착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여기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들을 이런 곳으로 인도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훈련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시고,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땅으로 가려면 걸어서 겨우 일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40년을 뺑뺑이 돌리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왜 하나님은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힘든 광야로 백성들을 이끄셨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서 오랜 세월을 노예로 지냈기 때문에 노예근성이 남아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갈라디아서에서 본 육체적 욕망이 바로 이런 노예근성입니다.
그것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육체적 욕망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광야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처럼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들짐승들만 존재하는 매우 두렵고 위험한 곳입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결핍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악마가 광야에 산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어떻습니까?
광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 곧바로 천국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광야같은 인생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는 많은 결핍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자원의 결핍때문에 민족들이 서로 싸우고 전쟁합니다.
생명의 결핍때문에 사람이 아프고 죽게 됩니다.
이런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 광야에서 물이 없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2, 3, 4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애써 도착한 르비딤에 물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쳐서 그를 죽이려했습니다.
모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입니다.
해결책을 찾기보다 먼저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보십시오.
아담은 자신도 하와와 함께 죄를 지어놓고선 하나님이 추궁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때문에 이렇게 됐다며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하와 역시 뱀이 꼬셔서 그렇게 됐다며 뱀을 원망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그들의 교만이 근본적인 문제였지, 뱀이나 하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원망과 불평에 익숙한 이유는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핏줄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원망하며 누구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또한 원망은 사실을 왜곡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해서 이 생고생을 시키느냐고 따졌습니다.
괴롭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종살이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원망은 전염성이 있어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여러명의 사람들이 모세를 희생양으로 삼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분위기를 망치는 시작이 바로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런데 원망과 불평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물이 없다고 과거 이집트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먹고 사는 문제만 누군가 해결해주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도 바꿀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라고 말하고 난 후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들을 노예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셨는데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것은 너무 배은방덕한 것입니다.
결국 원망과 불평이 심각한 죄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하는 원망과 불평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미끼와 같은 것입니다.
‘다 누구 때문이야’
우리는 이런 말을 쉽게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다 하나님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하는 은밀한 원망과 불평들은 무엇입니까?
나는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나?
이것의 속뜻은 하나님 왜 이런 부모님을 내게 주셨나요? 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못할까?
이것의 속뜻은 하나님은 왜 저를 멍청하게 만드셨나요? 입니다.
그럼 나는 왜 못생겼을까?
이건 무슨 속뜻을 담고 있을까요?
진짜 속뜻은 하나님보다 성형외과 의사가 더 위대하다는 의미인 것이죠.
결국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원망과 불평은 단순히 나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5,6절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사용하는 지팡이를 통해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 지팡이가 바로 나일강을 친 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나일강물을 피로 만들어 버린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통해 과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물이 없는 곳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됩니다.
고린도전서 10:1-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여기서 구름이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신 구름기둥을 말합니다.
바다를 지나갔다는 것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말합니다.
신령한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전서에 나온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며 겪은 일을 다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친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명수를 냈듯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쳐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피가 바로 우리를 구원한 생명수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힘들어하는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우물물을 뜨러 온 여인이였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녀는 마치 물없는 광야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7장 37-39절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목마름은 광야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인 목마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생수를 마셔야 해결되는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갈증을 돈이나 쾌락, 명예, 심지어 선행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런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그치고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수를 흘려 보내주십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가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가 볼 두번째 문제는 외부에서 일어난 입니다.
8절입니다.
“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서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중에는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가 숨가쁘게 탈출했기 때문에 그럴만한 시간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훈련된 군사들이던 아말렉 족속에 비하면 이스라엘 군사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9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소.”
11절입니다.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고, 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더욱 우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군사작전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산 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두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는데 두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집니다.
솔직히 팔 드는 것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의지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질 것이다.
이 전쟁은 주님을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에 승패가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일이 하나 일어납니다.
모세가 늙어서 오랫동안 팔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옆에 아론과 훌, 두 사람이 함께 있어 모세의 팔을 들어줬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전쟁은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었고, 아론과 훌은 양 옆에서 도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직접 전쟁에서 오합지졸같은 병사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맞서 싸웠습니다.
연합해서 싸워야 승리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함께 연합할 때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주십니다.
혼자 신앙생활 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영적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결론]
이런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광야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 버려진 것 같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곳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훈련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이 광야를 거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양한 광야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광야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답답하고 갈증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광야에서는 나를 공격하는 아말렉같은 존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해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물이 없어 원망과 불평했던 장소를 ‘맛사’라고 지었습니다.
맛사는 주님을 시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15절을 보시면 모세는 아말렉을 무너뜨리고 그 곳에 제단을 쌓았는데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원망과 불평으로 내 인생을 ‘맛사인생’으로 이름지을 지, 아니면 주님을 의지하며 전쟁에서 승리하는 ‘여호와닛시 인생’으로 이름 지을 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모두 인생길에 ‘주님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를 외치게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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