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6새벽] 슬로브핫 딸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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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92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본문 민27:1-11
거룩하신 하나님, 자격없는 죄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자요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건져주시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주심에 감사합니다. 늘 주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잠시잠깐 이 땅을 살아가지만 여기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님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비록 잠시 잠깐 이 땅을 살아가지만은 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의 중심이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그 나라에 임하기까지 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실 주님의 교훈을 사모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론]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뿐이라면 얼마나 덧없고 허무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잠시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을 더 움켜쥐기 위하여, 헛되고도 헛된 것들을 얻길 위해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어떠한 은혜를 입었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시고, 또한 장차 여러분들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을 주셨다.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우리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덧없는 세상의 삶에 빠져서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위하여 준비하는 차원에서, 또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여러분은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마침내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새벽의 시간에 이러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 한다.

[슬로브핫 딸들의 청원]

광야생활이 끝나갈 무렵,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인구조사를 명령하셨다. 두 번째 인구조사의 결과는 첫 번째 인수조사 때와 거의 비슷한 인구수를 보였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이백만 명이상 되는 한 민족이 40년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중에 수 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원망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38년 전 가데스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던 세대는 모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인구조사의 결과 놀랍게도 38년 전과 비교해서 인구가 크게 줄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를 준비해두셨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2차 인구조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얻을 기업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계수된 20세 이상 된 남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딸들만 남긴 채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집은 땅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가? 본문에 나오는 슬로브핫 딸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슬로브핫은 므낫세 지파의 사람으로서 당당히 가나안에서의 기업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땅의 분배를 위한 두 번째 인구조사 이전에 죽었고, 그 집안에는 아들이 없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들들에게만 상속권이 있었으므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기업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모세에게 청원을 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기의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지만, 고라의 반역에는 가담하지 않았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만일 고라의 반역에 가담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면 기업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슬로브핫은 3절에 ‘자기 죄로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지 못한다면 슬로브핫의 이름으로 보존되는 땅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슬로브핫 이라는 이름도 훗날 므낫세 종족의 계보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딸들의 청원은, 므낫세 종족의 다른 가족들처럼 자신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는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6-7절을 통해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장차 얻게 될 가나안 땅을 분깃으로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기업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 보완된 원칙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는 경우에는 그 기업을 딸들이 상속하도록 하셨다. 딸도 없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형제에게 주도록 했으며, 형제도 없으면 아버지의 형제에게, 그도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지시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얻을 기업이 끝까지 그 사람의 집안에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에게 기업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분배된 기업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그 집의 대표로 삼으셨으나, 그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여기신다. 단지 남자를 대표로 삼으신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 가정의 대표가 될 남자가 없을 경우에는 여자가 당연히 대표가 되어 기업을 상속받게 하신 것이다. 여자들은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기업을 누리는 데 있어서도 남자와 동등하다. 여기에는 그 어느 차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기업을 사모하라]

그렇다면 본문의 기사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에서 장차 주어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에 반드시 약속된 기업을 받고야 말겠다는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의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7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땅에서의 받을 기업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순수한 신앙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셨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슬로브핫의 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기업을 사모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기뻐하신 것이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도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셨다. 마15장을 보면 그 딸이 귀신이 들린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길 간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딸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 귀신들림을 고쳐주시길 간구하였다. 계속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마디 말씀도 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이 때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적으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좌절할만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한다. 이때 주님은 더 나아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셨다. 포기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뭐라고 말하는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에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며 그 딸을 고쳐 주셨다. 주님은 이 이방 여인의 겸손함, 믿음, 은혜를 갈망하는 태도를 귀하게 여기셨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약속된 영원한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땅을 얻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사모하며 그 땅을 침노하며 오늘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써, 그리고 겸손하게, 그리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받고야 말겠다는 믿음과 각오가 있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갈망과 사모이 있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이 얻게 되리라 말씀하시는데, 그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기 위하여, 그 영원한 나라를 쟁취하기 위하여 그 날을 열망하고 소망하며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날을 막연하게만 느끼며 그 날 그 순간이 올지 안올지 불확실함 가운데 그 날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냥 시간만 허비하며 살고 있는가?
분명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 있는 이 곳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결코 아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으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걸어갔던 것처럼, 이 세상을 잠시 잠깐 살아가는 우리도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한다. 그 날이 속히 우리에게 임하길 원하며, 그 안식의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그 순간을 고대하며, 최후 승리를 얻는 그 순간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잠시 잠깐의 허황된 것들에 우리의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며 인내하며 우리의 두 눈과 마음의 중심이 오직 하늘에만 고정된 채로 살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양문교회 성도들 되시길 축원한다.
기도하자.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허황된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그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하자. 그 영원한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질 그 순간을 고대하며, 소망하며,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특별히 오늘 주일이다.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도록, 주님의 그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하도록, 예배를 수종드는 모든 종들을 비롯하여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이 시간 간절히 “주여” 한번 외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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