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VS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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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에게 한 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유니클로’라는 의류 회사를 알고 계십니까? 유니클로 옷은 짝퉁이 없습니다. 가격이 저렴한 것에 비해 괜찮은 품질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했지만, 그것을 모방할 만큼 진짜가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샤넬, 루이비통 같은 명품은 어떻습니까? 이런 명품은 짝퉁 가방이 넘쳐납니다. 올해 8월까지만 해도 위조상품이 124억원어치가 압수되었다고 합니다. 짝퉁 가격이 원래 가격의 1/10 수준이라고 하니 짝퉁만 12억이 넘게 압수된 것입니다.
왜 이런 짝퉁들이 판 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짜가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품은 품질이 좋고 가치도 있어서 진짜 명품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이 짝퉁이라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는 세계 4대 종교라 불립니다. 그런데 ‘이슬람에 이단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에 이단이 있다’는 이야기는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몇몇 이단이 있을 수는 있지만 알려진 이단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이단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이 작은 한국 땅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자칭 하나님, 자칭 예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만 하나님이 20명이 있고, 재림 예수가 50명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에 이처럼 많은 이단이 존재하는 것은 기독교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여서 가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지난 3월 중순부터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 요한일서라는 편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귀가 아프도록 듣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짧은 편지 안에서 이상하리만큼 ‘사랑하라’는 교훈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는데, 그걸 잊으신 것처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하시면 좋겠는데 도리어 이전보다 더 강도 높고 더 깊게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에도 짝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사랑에도 진짜 사랑이 있고, 가짜 사랑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알고 행하던 사랑이 가짜였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했던 사랑이 진짜가 아닌 가짜인지,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알아가고, 진짜 사랑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지겹게 사랑에 대해 반복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 편지를 읽고 듣는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17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사랑이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면 그의 자녀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우리에게 반복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십니다. 10절은 어떻게 말합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진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며 우리가 했던 사랑은 가짜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서 ‘사람’과 ‘삶’과 ‘사랑’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영어와 독일어도 각각 ‘사랑하다’와 ‘살다’라는 단어의 뿌리가 같다고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시대에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진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람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생명을 걸어 맹세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쓴 맛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을 가득히 채워주기 바랐던 사랑은 아침 이슬처럼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는 사랑의 결말은 쓴 것입니까? 우리가 하는 사랑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숨까지 걸었던 사랑이 사실은 아주 조잡한 모조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은 고결한 것인데 왜 나의 사랑을 짝퉁 취급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는 어떤 조건 안에서만 사랑합니다. 그 조건이 깨지면 우리의 사랑도 깨집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부부 간의 사랑도, 연인 간의 사랑도 조건이 깨지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든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아간다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평생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행하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진짜 사랑은 손에 쥐어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말씀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 자체는 아주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그 말 속에는 ‘뼈 때리는 말’이 가득합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고, 적당히 사랑하려는 우리의 본성을 아시고 우리를 코너에 몰아 붙이면서 ‘적당히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우리에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하지 않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는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확인하는 시험지와 같습니다.
야고보서 2장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성도들을 질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랑을 행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고, 말은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이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지 꼼꼼히 살펴봅니다. 제 조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기 아빠와 완전 붕어빵인 것입니다. 외손녀를 본 아버지는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모습에 내심 실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에 변함은 없지만 닮은 곳 없는 외모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나면 하나님 아버지는 닮은 구석이 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모습 속에 사랑이 있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사랑의 모습이 없다면 ‘그러고도 네가 정말 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 하반절과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 야곱이 만난 하나님, 이삭이 만난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할까봐 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듣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부족해서 하나님은 한 가지 방법을 더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하나님처럼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시니 나도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따라 해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여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에서 16절까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앞선 본문에서 말씀하셨는데도 네 번이나 더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5절 말씀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며,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아는 지식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는 것을 체험해야 진짜 내 것이 됩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12절 말씀은 체험하는 것을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완전하게 있다가 우리 안에서 온전해 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백 번, 천 번 들어도 이 말씀은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를 하나님처럼 사랑해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체험하는 사랑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사랑을 받는 형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여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셔도 연약한 우리의 본성은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다 사랑할 수 있어! 저 원수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해. 백 번 양보해서 정신차리라고 기도는 할 수 있는데, 사랑은 절대 못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았으니 사랑 안해도 천국 가는데는 문제 없어’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따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3장 21절, 22절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어 담대함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17절 말씀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모든 이가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할 때 사랑을 행했던 우리는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믿고 신앙 생활 적당히 해도 하나님 나라는 가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심판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손발이 떨리고, 겁이 나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한 것이 아니라 살얼음 위에 서있는 것처럼 불안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사랑을 행하면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가지는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서도 일말의 걱정과 두려움 없이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정도만 말해도 되는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딴길로 새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다시 한 번 못 박고 있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보는 바 그 형제”라는 것은 ‘가까이 있는 사람’, ‘한 지붕에 사는 사람’, 혹은 ‘매일 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나와 ‘사랑하는 주님,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기도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사랑하기는 뭘 사랑하냐? 옆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도 않는 날 사랑한다고? 그거 다 입바른 소리고 거짓말이야!’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가까이 있어서 알게 되는 허물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흠이 없어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흠이 있기 때문에, 흠이 많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지금은 두 분 다 교회에 다니고 계시지만, 결혼할 때는 짝믿음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도 교회에 가기로 하고 결혼을 했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교회에 종종 가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친가 친척 중 한 가정을 제외하면 모든 가정에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명절만 되면 시골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준비와 명절 기간 등 시간을 같이 보내니 친가 친척들 사이가 참 끈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생 때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할아버지의 사업에 보증을 서준 것입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망하고, 보증을 선 일로 저희 집안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이었는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모르겠지만, 새 아파트에 살던 저희 가정은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일하시던 남해의 사택으로 들어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그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눈에 보이실 것입니다. 남해로 간 이후에 친가 친척과의 관계는 완전 다 끊어졌습니다. 명절 때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갔던 시골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믿음이 전혀 없이 교회만 다녔던 아버지였고, 보증 사건이 터졌을 때는 나름 교회에서 성도들과 관계도 하고 열심히 다녔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 앞에서 믿음이 실현되기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5년간의 타지 생활 끝에 다시 진주로 돌아오고 얼마 뒤 상황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신앙 생활을 해가면서 바뀌는 것이 있었는지 한 번씩 시골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있던 때 쯤 증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친가 친척 중에 유일하게 믿음이 있던 작은 할머니 가정이 증조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근처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갈 때면 복음을 전했는데 증조 할아버지가 소천하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제사를 드렸던 집안에서 증조 할아버지 장례를 기독교식 비슷하게 치르게 되었습니다. 함양 시골에서 평생을 제사 드렸던 집안이라 증조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바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관 위에만 ‘성도’라고 천을 씌웠을 뿐이지 옛날에 하던것처럼 상여를 씌워서 겉보기는 기독교 장례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후에도 기일에는 제사상을 완전하게 다 차려놓고 앞에서 추도예배를 드렸는데 시간이 지나 작은 할아버지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사 드릴 때 절 해야 한다고 해서 강제로 절도 드렸었고, 제가 좀 커서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 절하는 것을 거절하면 눈치를 많이 받았기에 이 집안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가 믿음이 생기며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지만 할아버지들에게 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앙 생활을 통해 경험하게 되니 그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떤 마음인지는 몰라도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잘은 몰라도 정말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힘겹게 사랑을 실천하셨을 것입니다.
모여서 추도예배 드리지 않으면 제사 드릴 것이 불보듯 뻔한 그 친척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명절 때마다 추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울에서 함양까지 내려와 함께 예배드린 작은 할머니와 고모의 사랑이 있었기에 친가 친척들도 예수님을 믿는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얼굴만 보면 불편해 지고, 말 섞기 꺼려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신앙 생활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어느 한 구석은 멍 들어 있는 것이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사랑이신데 우리가 미움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사랑이신데 내가 시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도 부담스럽고 숨막히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론 지겹게까지 느껴질만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시간 함께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조잡한 모조품 같은 사랑 밖에 하지 않았던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미워하던 사람을 하나님처럼 한 번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희생하며 사랑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