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9수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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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설교전 321 날 대속하신 예수께 / 380 나의 생명되신 주
317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기도 최순오 집사
본문 마 5:3 (신p.5)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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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선언]
[팔복 선언]
마5-7 장을 가리켜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 이라고 부른다. 이 내용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집대성으로서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도 하고, ‘기독교윤리의 근본’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산상보훈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했던 마5:3 절 말씀은 팔복선언 중에서도 가장 첫번째 복에 대해 말씀하신다. 산상보훈이 윤리적,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권면의 설교라면 팔복선언 역시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지금 주님 앞에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 건너편으로부터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어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지금 말씀을 선포하고 계신다. 정말로 주님은 그들에게 단지 윤리적인 설교를 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저들에게 여덟 개의 복을 선언하신다. 이 복은 서로 다른 복이 아니다. 모두 하나의 복을 가리키고 있다. 팔복선언의 구조를 보면 “~한 자는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자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이 여덟 개의 성품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여덟 개의 조건은 모두 하나의 예수님의 성품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문의 팔복은 마치 모자이크 미술과도 같아서 가까이에서 보면 각각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비춰준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선언은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이러한 주님의 성품을 닮아 주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안으로나 밖으로나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본문의 말씀을 원어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이렇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그들의 것이로다' 즉 예수님께서는 복을 선언하신다. 한문 ‘복’ 이라는 글씨를 자세히 뜯어서 보면 어떠한가? 왼쪽은 ‘볼 시', 오른쪽은 ‘한 일', ‘입 구', ‘밭 전' 으로 되어 있다. 이것들을 조합하자면 이렇다. ‘한 끼 때울 수 있는, 그 몇 평 안되는 밭을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이다. 참 소박하지 않은가? 한끼 배부르게 먹을 양식을 거둘 수 있는 밭을 바라만 볼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만큼이나 복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살아가기 쉽지 않고 버겁고 힘도 들고 해서 더 복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성경 안에 ‘복’에 관한 구절을 찾아 암송하기도 하고, 더욱 복에 대한 약속만을 붙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다 가진 자들, 소위 부자들을 복 있는 자들이라 말한다. 풍족하게 소유한 자들을 성공한 자들이라 말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가치관이요 세상의 기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적 가치관과 세상적 기준에 물들어간다. 그래서 교인의 사업이 갑자기 잘 풀린다거나, 혹은 승진을 하거나, 혹은 뭔가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고 표현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부하게 되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고, 더 큰 집을 얻게 되는 것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 이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 반드시 이 땅에서의 부유함으로 연결이 된다고 한다면,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의 말처럼 교회에 티코 타고 왔다가 그렌져 타고 나가는 것이 당연한 말이다. 반면 부자가 아닌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다가 만 것이 된다. 정말로 돈 없고 속된 말로 빽도 없는 가련한 신자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존재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실 때도 있다. 일이 잘 풀리게 하실 때도 있고, 명예를 얻도록 높이실 때가 있다. 또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필요한 세상적인 복들을 구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가장 작은 일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눈이 어두워 마치 이런 복이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잠깐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장차 들어가게 될 나라는 영원하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현세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하나님 주시는 신령한 복을 현세에서만 누릴 싸구려은혜로 만들지 말라. 오히려 성경은 영적인 복에 대해 더 많이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시는 이 복을 세상적인 복으로 국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주님이 선포하시는 이 복은 영적인 복이다. 이 복은 신령한 복이다. 주님은 지금 이러한 복을 선언하고 계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음을 선언하신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내가 소유한 것들을 다 처분해버리거나, 혹 법정스님이 말했던 ‘무소유'가 성경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란다.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반대말은 ‘심령이 부요한 자'이다. 우리는 왠지 부요한 것이 가난한 것보다 축복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주님은 단지 많이 가진 상태를 말씀하는게 아니다. 차고 넘치는 풍요의 상태를 말씀하는게 아니다.
부요한 자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이미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이상 자신의 소유를 위해 부지런히 수고할 필요가 없다. 이미 넉넉하게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사모하지 않는다. 갈급해하지 않는다. 게으르다. 농땡이 부린다. 방종의 삶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반대개념은 영적인 축복들로 충만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해하지 않고,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졌으며,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내팽겨친 채로 세상을 사랑하여 도로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와 같은 자들”을 가리킨다.
제가 충주에 와서는 거의 찾지 못했지만, 서울의 지하철 역들 계단에는 요즘에도 쭈그리고 앉아서 구걸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가난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그 찬 바닥에 엎드려져 있고, 깊은 절망과 상실감에 무기력하게 구걸하며 살아간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 가 바로 이런 상태를 잘 보여준다. 헬라어에서 ‘가난하다' 라는 단어의 의미는 ‘구걸하다, 쪼그리고 움츠려들다, 시달리고 압박당하다, 파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난한 자’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데, 여기서의 가난은 물질의 빈곤함을 말하지 않는다. 주님은 "심령” 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짚어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여기서 ‘심령’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마음을 지칭하기도 하고, 우리의 영혼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두 측면 모두 해석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 측면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갈망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를 겸손히 비울 줄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은 비록 세상의 것들을 넉넉하게 가졌더라도 이것에 지나치게 욕심이나 집착을 부리지 않으며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명하신다면 언제든지 나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세상의 것들을 비우며 나 자신을 겸손하게 여길 줄 아는 자들이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파산한 자와 같다. 파산한 자가 그 채무를 갚기 위해 더이상 어떤 손도 쓸 수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 파산한 자들은 자신의 영적 충족을 위해, 그 굶주림을 해갈하기 위해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다. 내가 내 갈함을 충족할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채워주심만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그 마음의 중심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만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이 땅의 것들이 아무리 많다 하기로서니 그것들이 그들의 심령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 그것들이 그들의 구멍난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도저히 채워줄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왜 복이 있는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인가? 물론 큰 의미에서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천국이 이미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을 조금 더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통치가 충만한 그 나라를 이미 유업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영적 파산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풍족히 채워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은혜를 사모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를 돌아보라]
[나를 돌아보라]
이제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매번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고 그 복이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빚어져가는 이 일을 위하여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오직 이 제목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 땅의 것들에만 우리의 눈이 고정되어 그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부분인 땅의 복만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닮아갈 수 있길 간구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 땅의 물질, 성공, 번영, 형통만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맞기는 한가? 영적으로 가난하고, 시달리고 압박당하여 곤고한채로 납작 엎드러진 상태가 맞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나의 삶 가운데, 나의 신앙 가운데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만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만 내가 살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간절히 그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가?
진짜 위기는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 위기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심령이 부요한 자로서 이제는 더이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도 없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은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은혜 언저리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이정도면 됫다' 하며 더이상의 몸부림이나 기대치 없이 그저 예전부터 해 오던대로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더 크고 깊은 은혜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목마름도 없으며, 갈급함도 없는, 영혼의 위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모든 생명체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특히나 사슴은 물에 취약한 동물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속해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이 너무나도 귀하다. 그래도 그나마 우기 때는 물을 구하기 쉽지만 건기가 되면 정말 물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그 갈증은 더해만 간다. 심한 갈증으로 사슴은 기력이 다하게 되고 헛것도 보인다. 물이 있는 것 같아서 달려갔더니 물이 없다. 그렇게 수 차례 허탕을 치다보면 결국 그 뜨거운 광야에서 사슴은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기진한 사슴에게 물 한모금은 정말로 생명과도 같다.
시인은 목 마른 사슴이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물을 찾아 헤매이는 것처럼, 내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고백하였다. 갈급한 내 영혼을 채워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한 것이다. 내 수중에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지만, 내 영혼, 내 심령은 그런 것들로부터 일절 만족을 누릴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심만을 사모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들은 나의 심령에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니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조금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 :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자]
[결론 :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자]
우리의 마음에는 그릇이 있다. 각기 분량에 따라 그 그릇이 소주잔마냥 작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그 그릇이 대야만큼 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그릇의 크기가 어떠하든지간에 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내가 이것도 좋아해서 이것도 넣고, 저것도 좋아해서 저것도 좀 담고, 이것도 좀 넣고 저것도 좀 넣고… 그러다 맨 마지막에 하나님 서운해하실 것 같으니 하나님도 좀 넣고… 이런게 안된다.
주님은 아주 엄중하고도 명료하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내 마음의 그릇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존재 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에 무엇을 채우길 원하시는가? 여기에도 기웃, 저기에도 기웃할 것이 아니라 하나만을 전념하고,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나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채우고자 하시겠는가? 마음의 그릇에 단 한 자리만 있다 한다면 잠시 잠깐 살다가 가는, 영원에 비추면 “점”에 불과한 이 땅의 것들에만 급급하며 그것에만 목마른 채로 살아갈 것인가? 그것들은 우리 영혼에 아무런 만족을 줄 수 없다. 우리의 구멍난 심령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홀로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구멍난 심령을 능히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단 하나 뿐인 마음 그릇을 내어드릴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시고 탁월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찾으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문들이 열리기를 끊임없이 두드리라. 그 은혜가 아니고서는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생명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은혜를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이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상속받음을 기억하며 늘 하나님의 은혜만을 갈급해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그렇게 원하고 바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 베풀어주실 것이다.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이 시간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자.
우물 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많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주 안에 감추인 보배 세상 것과 난 비길 수 없네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듭니다 하늘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함께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자. “주님, 우리의 텅 빈 심령을 채워주실 이는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실 분도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갈급한 심령에 참되고도 영원한 만족을 주실 이도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그릇들을 주님께 높이 올려드립니다. 주님, 주의 한량없으시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갈급해 하는 심령들에게 그 은혜를 계속해서 부어 주옵소서. 주의 충만하신 은혜들을 간절히 사모하오니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옵소서. 이 은혜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시간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