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심(눅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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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기에 너무나도 좋은 밤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한 분 한 분 여쭤보고 또 그 특별하고 인격적인 만남들을 전하여 듣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시간관계상 제가 경험했던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한 번 나누어보려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교회에 가면 친구들도 있고 먹을 것도 많다는 이유로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부 선생님과 친구들의 권유로 수련회라는 교회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그 수련회가 학교에서 1박 2일 정도로 가는 캠핑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신나는 마음으로 수련회를 참석했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하니 조를 편성하고 레크리에이션이나 게임을 하긴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수련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니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엉겁결에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벽에 걸려있는 시간표를 보았고, 교회 수련회는 예배가 가득찬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후회를 했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수련회 장소는 고등학생이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 번째 날의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두 번째 날에는 세족식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 저를 부르셨고 또 만나주셨습니다. 은혜로운 피아노 소리와 함께 세족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고등부 선생님께서 제 발을 씻어주시는데 별안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놀라셔서 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셨고 괜찮아 괜찮아만 연발하셨습니다. 제가 울었던 이유는 선생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 때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깊이 상관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련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들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고 기도도 해보고 했습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돌아온 저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드라마틱하게 바뀌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련회 이후 다시금 예수를 만나기 전 저의 삶의 모습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요, 제 경험과 오늘 말씀 속 베드로의 경험이 좀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처음 부르시고 난 뒤 여러분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옛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만을 기다리십니까? 아멘! 그런데 여러분, 바울 선지자도 옛사람과 자신이 끊임없이 싸운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저와 같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던 적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예수님을 뒤로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채로 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속 베드로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봄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부르심을 다시 기억하고 또 경험하며 도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구약에서는 긴네렛, 신약에서는 게네사렛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에 북서쪽에 위치한 지방의 이름입니다. 갈릴리호수는 대략 12km의 폭과 21km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가장 깊은 곳은 43m정도나 되는 커다란 호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수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갈릴리 호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요, 갈릴리 바다, 게네사렛 바다, 디베랴 바다는 모두 이 갈릴리 호수를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 속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런데 이 호수에 배 두 척과 그물을 씻는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부들 중에 오늘 본문 속 등장인물인 시몬,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과 잠깐 베드로에 관한 오해들을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우리는 보통 베드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못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 가난한 어부라는 이미지가 있지 않으십니까? 과연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다.>(눅5:1-2)

베드로에 대한 이 오해는 베드로가 선한 것이 날 일 없는 갈릴리 사람이며 또 어부라는 직업에서 나오는 편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당시 사람들도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가 학문이 없는 범인, 그러니까 일반 사람인줄 알았다가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증언이 등장합니다. 과연 베드로는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였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안드레 그리고 베드로 빌립 등은 구약에 등장하는 히브리식의 이름이 아닙니다. 히브리식 이름 치고는 뭔가 좀 더 세련되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들의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또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어부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헬라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여 집니다. 이들은 소위 헬라 문화를 좀 누리는 문화시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최소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안드레와 베드로는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영접할 정도로 종교와 진리 그리고 철학에도 관심이 많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사람의 출신이나 학벌 등으로부터 오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난한 어부 베드로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은 빵이나 육류 혹은 물고기였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경우 이스라엘의 더운 기후 때문에 쉽게 상하는 식재료 중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하여 유통을 했습니다. 이렇게 가공된 생선은 값이 매우 비쌌는데, 플루타르크라는 1세기의 역사학자는 로마에서 가공되어 유통되는 물고기 한 수레의 값이 양 백 마리와도 맞먹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규례 때문에 갈릴리 어부들이 잡은 고기들만 사서 먹었습니다. 과연 어부들은 가난했을까요?
베드로는 여기다 사업수완이 좋은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를 벳새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벳새다 사람이 게네사렛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이유는 통관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을 했었는데 그 당시 벳새다와 게네사렛은 통치자가 달랐습니다. 두 통치자는 각각 다른 통관세를 두었고 때문에 벳새다에서 잡은 고기를 유통하는 것보다 게네사렛에서 고기를 잡아 가공, 유통하는 것이 통관세가 더 저렴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재산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장모를 모실 집이 있었고 자신의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하직원들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잃을 것이 없는 무식하고 가난한 어부가 아니라 일구어놓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오해는 본문에 대한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 1장, 마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물을 ‘씻고’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것은 고기를 잡는 중이고 그물을 씻는 것은 고기잡이를 끝낸 상태를 나타내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째로 뵙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에 제 이야기를 잠깐 들려드렸을 때에 저와 베드로가 닮았다고 한 점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온 것처럼 베드로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 예수님을 떠나 다시 이전 삶의 자리에 돌아와 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의미는 어업을 마치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갈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예전의 삶으로 돌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베드로는 아직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옛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처음 보시고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장차'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그는 반석이 아니라 반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나고 있는 원석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시몬의 이름을 시몬이라고도 쓰고 시몬 베드로라고도 쓰면서 그 이름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장차 베드로가 될 시몬’이라는 등장인물의 오해를 풀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베드로가 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와 다시 시몬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질문을 한 번 던져보면 좋겠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메시아라고 믿지 못했던 사실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그분이 훌륭한 랍비요 선생님이라고 인정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 투자할 정도로 그분과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삶이 자신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해야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 또 자신이 일구어놓은 사업들을 버리고 따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저의 모습이 참 닮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따듯했고 눈물이 날 정도로 예수님을 느꼈습니다. 그분께 끌렸고 관심이 갔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다시 일상에 복귀한 저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습니다. 학업과 놀기라는 학생의 일생일대의 문제들 앞에 저는 하루하루 그물을 씻고 다음날을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은 주일에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분 정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물론 위대한 분이시고 뛰어난 분이시며 따듯한 분이셨지만, 그 분이 제 삶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조금 무거운 질문을 조금 던져볼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 속에는 베드로와 닮으신 부분이 없으십니까?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의 설레임과 마음을 잘 간직한 채로 살아오고 계십니까? 주일 예배에 만난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그 예수님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상태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예수님을 그저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는 어떤 존재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뒤로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님보다는 먹고사는 문제가 바빠 밤새 수고하고 또 그물을 씻으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오신다.>(눅5:3)

그런 베드로와 저희들인데 여기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는 다른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옛 삶으로 되돌아간 시몬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시몬의 배가 있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시몬의 배에 오르십니다. 누가는 이 부분에서 베드로를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고 적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을 잊고 정말로 옛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분이 시몬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었다면 굉장히 무례하고 당황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어부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는 갑자기 내 배에 탑니다. 이제 배를 정박해놓고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 타이밍이었습니다. 가장 나쁜 사람이 퇴근할 때에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배에 이미 타놓고 이렇게 부탁합니다. “배를 좀 띄워주세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무례한 사람이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인격적인 분이셨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를 아시고 그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또 시몬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추가적으로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뜨거운 이스라엘의 햇볕을 받으면 물이 있는 호수는 비교적 온도가 낮은데 반하여 땅은 온도가 높아 온도차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 온도차로 말미암아 바람은 호수에서 땅으로 불며 해풍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 동시에 공기의 밀도와 소리의 굴절이 발생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이용하셨습니다. 실생활에서 이 원리를 적용해보자면, 우리가 낮에 말하는 것보다 밤에 말하는 것이 더 잘 들리는 이유도 낮과 밤의 온도변화에 따른 공기의 밀도와 소리의 굴절 때문입니다. 이 개념을 찾아내어 이해하는데도 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도 아닌 예수님께서는 2000여년전에 이 원리를 이용하셔서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배’라는 장소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 ‘배’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배는 시몬의 것입니다. 즉, 지금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인 배는 시몬이 주인인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 공간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앉으십니다.’
이 앉는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배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으실 때 앉는다는 단어에는 어떤 공간에 주인이 된다는 뜻과 통치한다는 뜻을 함께 포함합니다. 우리가 보통 자리에 앉는다라고 할 때에 앉는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자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 소유가 아닌 곳에서는 마음대로 앉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몬이 주인인 그의 배에 오르셨고 또 그 배에 앉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삶의 자리 가운데 오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 이 이야기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나 내 삶으로 돌아왔는데 그 예수님께서 다시 나를 찾아와 나의 인생, 나의 삶의 터전, 내가 주인인 ‘배’에 오르셔서 나의 영역에 앉으셨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시몬은 매우 불편였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불편한 이유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힘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으십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져서 우리가 불편함을 더욱 크게 느끼는 상황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오늘의 본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잊고 살아갈 때, 예수님을 떠났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불편한 상황,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고 시몬은 그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거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말씀은 물론 좋은 말씀, 은혜의 말씀이었을 테지만 시몬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불편함과 피곤함이 뒤섞인 채로 ‘설교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끝나면 어떡하지?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다시 찾아오셨을 때에 그것을 불편함이나 부담이 아니라 은혜로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깊은 데로 나아가 내리라.>(눅5:4-7)

드디어 설교가 끝났습니다. 이제 시몬은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합니다. 조금만 자고 나와서 다시 생업으로 복귀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이 영 풀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저는 이 말씀을 상상하여 보다가 웃음이 나왔습니다.
시몬은 좋든 싫든 예수님을 내 배에 태우고 나가서 불가항력적으로 말씀을 들어야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려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얼마나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혹시 지금 그렇게 예배를 드리시고 계신 분이 있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그 자리가 본당 맨 앞줄 목사님과 눈을 마주치는 자리리였던 겁니다. 끔찍합니다. 그리고 이제 목사님께서 축도하고 집에 가나 싶었는데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시몬을 불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구가 웃긴 이유는 토목, 건축업자가 하필이면 현직 프로 어부에게 어업으로 하는 훈수이기 때문입니다. 어부 시몬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시몬과 어부들은 밤새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낮보다 밤에 훨씬 더 고기를 잘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수면의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잡어도 많고 물고기들이 깊이 숨어 지낸다고 합니다. 날도 더운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서 숨어있는 물고기들을 잡는 것보다 밤에 먹이활동을 위해서 수면으로 올라온 물고기들을 잡는 것이 당연히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자신들의 노하우로 밤새 물고기를 잡았는데도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부들은 철수를 결정했고 다시 밤에 나와서 고기를 잡을 요량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말은 얕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보다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조업 결과를 보면 얼마나 가능성이 없고 또 화가 나는 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봅시다. 지금 시몬은 밤샘근무를 하고 퇴근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잠시 뒤 출근을 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고기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미운 사람이 바로 말로만 훈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수확도 의미도 없는 밤샘근무로 인해서 얼마나 짜증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한 때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따랐던 선생이고 또 기껏 떠났는데 그 분이 다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차마 “아 저 자야 됩니다.” 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저는 이렇게 상황을 상상하며 말씀을 읽었을 때에 ‘말씀에 의지한다’는 말이 참 걸렸습니다. 분명 저였다면 이를 꽉 물고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의지하여’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ἐπὶ’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위에, ~에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에 혹은 당신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내가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 정도의 마지못해 그 말씀에 따르는 모양새가 됩니다. 여기에 의심과 짜증도 조금 섞였을 겁니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서 이 이야기는 해결과 결론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우리는 모두 이 행동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고기가 그냥 잡힌 정도가 아니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시몬은 어안이 벙벙했을 겁니다. 코웃음을 치며 한 번 해보자 식으로 그물을 내린 그는 텅텅 빈 그물을 예수님 눈앞에 들이대며 “보셨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 제 배에서 내리시고 갈 길 가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웃음 치며 행동한 그 행동의 결과는 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뒤바꿀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생이라는 배에 오르셔서 앉으십니다. 그리고 그 배에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틀린 말씀을 하시거나 상식 밖의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자신을 떠나간 베드로를 또다시 부르실 때에는 날이 새어갈 때였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이 아닌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근거가 없거나 터무니없이 틀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동은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전문가인데, 내가 내 배의 주인인데, 내가 이 일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데, 내가 밤새 수고했는데도 안 됐는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몬은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의심과 짜증이 묻어난 행동에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역사하십니다. 시몬의 이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고 다시금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시몬에게 그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정체성이 고기를 낚는 시몬이 아닌 사람을 낚는 베드로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배에도 오르시기를 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배에 앉으시고 말씀을 전하실 것입니다. 또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부분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시몬처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다 해본 건데, 저렇게 하면 더 쉽게 할 수 있는데, 남들은 다 저렇게 하는데, 안 될게 뻔한데, 나 피곤한데,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런데 여러분, 오늘 시몬이 행동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보시기를 도전해 봅니다. 다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면 그물을 내려 보시기를 도전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보다 행동을 통해서 ‘이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그 행동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나님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시몬과 같이 다시금 믿음을 잃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장차 베드로로, 반석으로, 제자로 다시금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계속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우선 프로답게 자신의 일에 집중합니다. 동료들을 불러 모으고 배에 고기들을 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기들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고기들을 배에 싣는데, 싣다가 싣다가 배 두 척이 모두 물에 잠길 때 즈음 되어서야 시몬은 문득 지금 고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11)

시몬은 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단 한 사람 때문인 것을 또 그 사람의 한 마디 말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정신없이 고기를 주워 담던 그는 자신을 향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던, 네가 장차 베드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분과 눈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순종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없음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낚고 있었습니다. 반석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그는 보잘것없는 원석이었습니다. 그는 두 척의 배에 가득히 잡힌 고기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이 말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죄’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자신의 집에 들이지 못합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감히 예수님을 눈앞에서 볼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대했던 사람들과 같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감히 함께할 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 앞에 시몬은 그 분이 나와 같은 급의 존재가 아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무릎을 꿇고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저도 이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기억을 뒤로하고 저만의 삶을 살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 인생이라는 배에 찾아오셔서 예배라는 그물을 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내키지 않았고 또 하기 싫었지만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하였기에 저는 행동하였습니다. 의심 반 그리고 짜증 반으로 드렸던 예배의 결과 저는 그곳에서 이곳에 있습니다. 저는 그 예배라는 그물을 던짐으로써 제 인생의 길과 지으신 목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물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믿음의 동역자들 그리고 기쁨과 자유함 또 동서울광염교회라는 복된 교회와 주일학교 친구들, 성도님들이 그 물고기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그 고기들을 주워담다가 저는 어느 순간 눈을 들어 이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때 느낀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습니다. 저의 믿음없음을 보게 되었고 저와 예수님의 ‘급’차이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떤 이유로든지 그 분 앞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감히 하나님이신 그 분 앞에 우리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없음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과거와 작음과 보잘 것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랬듯, 시몬이 그러하였듯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며 그 분 앞에 엎드려 저를 떠나달라고, 저 같은 죄인과 함께있어 예수님의 격을 떨어뜨리지 말아달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몬을 다시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시몬의 죄를 사하시고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며 그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셔서 함께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시몬을 장차 베드로라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시 시몬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부르심에 목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시몬은 결국 배 대신 그 배에 앉으셨던 예수를 선택합니다.
여러분,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습니까?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가 한 번 더 예수님을 부인할 것임을 압니다. 또 돌아가서 어부가 될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그는 또다시 옛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또다시 말씀하시고 부르심의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언제든지 틈만 나면, 우리 삶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옛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결코 우리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과 부르심이 필요합니다. 시몬은 그의 힘과 능력, 의지로는 베드로라고 칭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이었던 그가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선택하셨고 사랑하셨으며 베드로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그는 비로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부르심이며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잡힌 물고기가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리>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옛 삶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또 말씀하시고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생에 주인이 자신이 아닌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의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흔들리는 삶에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배에 올라 말씀하실 것이고 또 행동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행동하는 결정을 내리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행동은 어부에게 그물을 내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또 그렇기에 불편하고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의심과 고민이 있을 수 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우리 오늘 함께나눈 말씀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없음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 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함께 서 있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우리 마음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사랑의 추격전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해 짜 놓으신 계획이 있으시며 장차 친구요, 형제요, 구원받은 천국백성이라 부르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구원의 과정을 밟아나가고 계신 여러분, 삶의 문제들 앞에, 거대한 현실 앞에 흔들릴 때에 오늘 함께 나눈 은혜를 기억하며 또 베드로를 기억하며 위안을 얻고 또 힘을 얻어 부르심 받은 천국백성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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