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새벽]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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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22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본문 삿 17:1-6
하나님, 오늘 새날을 허락하시고 이 새벽에 예배당에 출입하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들을 주장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를 귀하게 여기며, 늘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단지 눈 앞의 이득을 좇아 우리의 믿음을 팔아먹지 않게 하시고, 양심을 팔며, 하나님도 갖다 파는 은혜를 모르는 자 같은 모습을 취하지 않도록 하나님 날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실 주님의 교훈을 사모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론]

기독교는 기복신앙이다. 기복 신앙이란 하나님의 복주심을 바라는 것이다. 복을 바라는 신앙인데, 그 중심은 ‘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향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베푸시는 복,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셔서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날마다 거룩해져가는 복, 그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나라로 우리를 이끄사 그곳에서 영원토록 누릴 복,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길 사모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기복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복에만 모든 초점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마치 도깨비방망이나 요술램프처럼 하나님을 생각하여 나에게 복을 주셔야만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매일 새벽마다 물을 떠놓고 우상들에게 공을 들이며 기도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우상들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함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간절하게 우상들에게 빌며 정성을 쏟으면 그 우상들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소원을 위해 우상을 이용하는 것이고, 우상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나도 하나님께 공을 들이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해 섬겨주셔야만 한다, 나에게 복을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자들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복주심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복을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풍성한 복으로 가득 채워주시길 소망한다. 이것이 나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요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복에만 맞춰져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복을 주셔야만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의 소원을 이루는 식으로 신앙이 치우친다면 이는 잘못된 신앙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배경]

삿17-21 장의 말씀은 사사기의 부록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1-16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은 이웃나라들로 이스라엘을 징계함으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이에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대적들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신다. 이 역사의 반복이 사사기의 주 내용인데, 17-21장에서는 이 사이클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이 부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17-18장에서는 ‘미가’ 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19-21장까지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타락이 어디까지 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 라는 인물을 보여준다. ‘미가’라는 이름은 ‘미가예후'의 줄임말로서 그 의미는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이 이름만 보았을 때는 그가 이름에 걸맞는 위대한 일들을 감당할 것 같다.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도 엄청난 신앙인 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는 2절에서 어머니의 돈 은 천백개를 훔쳤다. 우리는 이 값어치에 대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삿16장을 보면 블레셋 방백이 그토록 원수같이 여기던 삼손의 목에 걸었던 현상금이 은 1,100개였다. 한 민족이 죽이고 싶어하는 민족적 원수의 현상금,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큰 액수가 분명하다.
삼손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그가 사랑에 빠져있던 들릴라에게 블레셋 방백들이 찾아가서 묻는다. 우리가 어찌해야 삼손의 능력을 결박하고 그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그 비법을 알아온다면 각각 은 1,100개씩을 들릴라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 따라서 은 1,100개는 단지 ‘많은 양’ 만을 의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배신의 의미까지도 담겨 있는 것이다. 들릴라가 삼손을 배반하고 팔아넘겼던 은 1,100개가 본문에서 다시 등장함으로서, 미가는 자기 어머니를 배신한 의미를 담고 있다. 미가는 어머니의 돈을 훔치고 어머니는 그 돈을 훔친 자를 저주한다.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할까 두려워했던 미가는 훔친 돈을 다시 어머니께 돌려드린다.

[미가의 어머니]

이에 어머니는 3절 하반절에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머니가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 예물로 드리는 것 같다. 그러나 3절 초반부를 보면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 드리겠다던 고백은 그냥 말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여호와께 은을 드리고자 했다더라도 신상을 제작한 것 자체가 문제이다. 하나님은 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가의 어머니는 되찾은 은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면서 우상을 제작해 버린다. 그 어미가 신상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은을 되찾은 것에 대한 감사 혹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신상을 만든 최종 목적은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미가]

두번째 부류인, 그 아들 미가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오직 삶과 신앙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만을 드러내었는가? 그렇지 않다. 4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신상을 집의 산당에 두었다. 그러나 미가는 신상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5절에 보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자기 제사장으로 세운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정교한 의복이고 드라빔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데 사용하는 도구였다. 또한 그는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상으로 세웠다. 이러한 모습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였고, 이 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부패한 시대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가의 이러한 행동 이면에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 함께 읽진 않았지만 7-13절의 내용을 보아도, 자기 아들 중에서 제사장을 세운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레위인을 자신의 개인제사장으로 삼고, 13절에서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 아노라' 라고 말한다. 미가의 모든 행위에는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자기 행복과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돈을 훔쳤고, 그래서 신상을 만들고, 그래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자기 아들을 편법으로 제사장 삼으며, 레위인까지도 개인 제사장으로 세운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보라. 미가는 신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며 개인 제사장을 세우면서 이방신을 섬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이런 일들을 범했다. ‘'은 물론이고 ‘어머니', ‘자기 아들', ‘레위인'까지, 아니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복을 위해 이용하려 한다. “돈을 이용해서라도, 어머니를 이용해서라도, 아들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을 받자” 이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다. 이는 그의 겉모습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언약백성 같은데, 그의 삶과 그의 신앙은 언약백성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방인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정말 이 모습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우상을 동원하여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는 그처럼 신상을 만들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가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잘못된 신앙은 어쩌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오로지 이 땅에서의 복에만 우리의 마음의 중심과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그 복을 움켜쥐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잘못된 신앙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복에 더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되심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으로 인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만족과 내 복을 위해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소원,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으니 늘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의 행복만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순결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은 어딜 향해있는지를 돌아보라.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상급과 복에만 두지 않고, 미가처럼 개인의 행복과 만족에 두지 아니하고, 또 미가의 어머니처럼 자식의 성공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우리의 왕되시며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며 선한 것들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 두며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기도하자.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어딜 향해있는지를 돌아보자. 혹 우리도 미가와 그의 어머니처럼 세상의 복과 자신의 만족에만 초점이 맞춰진 기복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탁월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기도하자. 모든 복들의 근원이요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길 기도하자. 오직 영원부터 영원까지 홀로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자존하신 하나님만 그에 합당하게 예배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길 기도하자. 이 시간 이러한 제목으로 ‘주여' 한번 외치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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