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ly Broken
The end of me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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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8
마태복음 5:8
도입
복음에 대해서 고민을 하던 중 카일 아이들먼의 “The End of Me”에 나온 chapter들을 수정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랜드필하모닉" (영상 5분) - 쓰레기 더미 한복판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폐품으로 만든 고물 악기를 손에 든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사람들은 쓰레기를 보냈지만 이들은 쓰레기로 음악을 주었다. “
복음서를 펼치면 장마다 랜드필하모닉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천국의 보좌를 떠나 이 쓰레기 매립지로 내려오신 예수님, 완벽한 삶을 포기하고 깨어짐과 고통의 삶을 선택하신 분. 그분은 통곡 소리를 웃음으로 바꿔주셨다.
본문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은 산상수훈이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설파하셨다. 그분은 이 땅의 쓰레기 매립지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중이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차베스의 아이디어처럼 비상식적이었다. 예수님은 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분 안에서 진정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설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상의 나라에서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올라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가르침인가. 일부 신약학자들은 이 선언을 “대역전" (Great Reversal)이라 부른다.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러분, 문득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습니까?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려다가 말이 헛나온 게 아닐까요? 그러나 여기에 는 ‘심령이'라는 전제가 붙어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 받은 삶은 어디까지나 부족한 게 아니라 넘치는 삶인데 말이다. 여기에서 ‘가난한'으로 사용하신 단어가 ‘economically destitute’라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심령이 파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완전히 파산해서 내놓을 게 하나도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생각할수록 충격적인 말씀이다. 나의 끝에 이르러,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비로소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 이 세상의 논리와는 철저히 대치된다.
쫄딱 망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세상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굴지 않는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심령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심령을 칭찬하신다. 쓰레기 더미 속에 저 남자야말로 복 받은 사람이란다.
세상은 늘 자신감을 내비치라고 가르친다. 요컨대, ‘심령이든 뭐든 부유하라!’ ‘쓰레기 더미 위가 아니라 세상의 꼭대기에 서라!’라고 말이다.
예화) 요즘 영성일기를 쓰고 자기 전에 가끔 페이스북에 뜨는 영상을 랜덤으로 본다. 어떤 페이지를 보면 거기에는 어떤 유튜버가 나오는데 늘 자기 포르쉐 차량 로고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곤 정말 좋은 식당, 비싼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한 것처럼 영상을 통해 오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카일 아이들먼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phrase를 “하나님 나라는 잔고가 ‘0’이 될 때 시작된다.’라고 표현한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장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다 깨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깨어져 있는 걸까?
누가복음 7장을 가보자. 우리는 거기서 ‘시몬'이란 종교 지도자의 집에서 벌어지는 저녁 만찬회장을 볼 수 있다.
이런 만찬회에는 분명한 예법이 있었다. 일단, 환영의 표시로 손님의 손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 하지만 시몬은 시작부터 예의를 무시했다. 또한 그곳은 사시사철 먼지가 날리는 지역이다 보니 발을 씻는 게 일상이었다. 당시는 포장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인의 집을 방문하면 꼭 발을 씻어야 했다. 이런 만찬회에서는 주최 측에서 내빈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시몬은 이 절차도 건너 뛰었다.
또 특별한 환대의 표시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줄 수 있었다. 이때 기름은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싸구려가 아니라 최고급을 사용해야 했다. 예수님께는 기름부음도 없었다. 시몬은 종교지도자다. 그런 사람이 고관대작들 앞에서 종교적 법을 무시했다. 돈과 권력을 손에 쥐면 시몬처럼 대부분 교만에 빠진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한 여인이 난입해 잔입해 잔치의 흥을 깬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매춘부를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 그날 한 창녀가 지체 높은 종교 지도자의 집을 방문했다. 시몬의 눈살이 찌푸려졌을 게 분명하다. 종교 지도자의 집은 더러운 창녀가 함부로 출입할 만한 곳이 아니다.
이 여자는 왜 경건한 자들의 저녁 식탁에 나타났을까? 고결해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수치심과 굴욕감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아마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인생의 끝에서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분, 슬픔 대신 희락을 주시는 분, 끝을 또 다른 시작으로 만드시는 분.
‘혹시 내가 대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비수와 같은 시선이 날아온다. 하지만 이 여인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다. 그런데.. 그분의 눈에는 일말의 정죄도 없다. 치워야 할 쓰레기 더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여인은 깨어진 인간이고, 스스로 그것을 잘 알았다.
바로 이 여인은 ‘아름답게’ 깨어진 존재다. ‘Beautifully Broken”
이 장면은 머릿 속에 그려 보라. 예수님이 탁자에 몸을 기대고 계신다.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팔꿈치 밑에 쿠션을 깔고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있다. 그 자세에서 발은 탁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갈 때 처음 닿은 곳은 그분의 발이었다. 시몬이 씻겨드리지 않은 그 발. 그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 진다. 여인은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나 혐오와 거부의 눈빛이 쏟아지고 있다. 그들 중에는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까봐 떨고 있는 자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윽고 여인과 예수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그 순간, 예수님이 환하게 웃으신다. 예수님께 여인의 방문은 깜짝 선물과도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께 그녀는 쓰레기가 아니라 보물이었다. 예수님께 그녀는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그 웃음에 여인의 빗장이 풀린다. 이제 여인은 자신의 끝에 이른다. 툭툭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다 이내 펑펑 눈물을 쏟는다. 진정한 사랑 앞에서 여인은 무너지듯 주저 앉아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눈물이, 시몬이 제공했어야 할 발 씻을 물이 된다.
눈물의 재미난 점은, 눈물이 우리 눈을 가득 채울 때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이 씻기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더없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주인에게 수건을 달라고 할 처지가 못 된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다. 당시 여인들은 밖에 나갈 때 항상 머리를 묶고 나갔다. 여인이 남편이 아닌 남자를 위해 머리카락을 풀면 명백한 이혼 사유가 됐다.
시몬은 충분히 물과 깨끗한 수건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러운 여인이 정화를 몸으로 구현했따. 자기 눈물을 발 씻을 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사용했다. 여인이 이번에는 향유를 꺼낸다. 창녀들에게 향유는 필수품이었다. 향유 한 방울에 남자 한명을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병째로 전부 쏟아 붓는다. 이제 그녀에게 향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새사람으로 바꿔주신 분께 자기가 가진 전부를 내놓는다.
항상 예상을 깨는 가르침을 펼치셨던 예수님은 이번에도 모두가 의롭다고 말하는 남자와 모두가 악하다고 말하는 여자를 정반대로 다루신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7장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약속을 이행하셨다.
적용)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누구이고 싶은가? 돈과 권력을 갖고 모두의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나 대궐처럼 으리으리한 집에서 날마다 진수성찬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사회에서는 천대를 받지만 예수님께는 사랑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택하겠는가? 우리는 깨어지지 않고도 온전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마침내 “아, 예수님, 이제 알겠어요! 이제부터는 제 부와 지위를 좀 더 현명하게 누릴께요"라고 말하는 시몬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이미 깨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화) 연약함에 관한 사회학자 브레네 브라운의 강연을 담은 TED 동영상은 지금까지 1,500만번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 인기 비결은, 깨어졌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내심 그 사실을 인정할 자유를 사람들이 원한다는 걸 정확히 짚어냈다는 데 있다. 브라운은 이런 깨어짐에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번의 임금 체불, 한 번의 이혼, 한 명의 마약 중독자 자녀, 한 번의 정신병, 한 번의 중병, 한 번의 성폭력, 한 번의 폭음, 한 번의 성병, 한 번의 불륜이면 ‘그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경멸하는 사람들, 우리가 자녀들에게 어울리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는 사람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 절대 이웃으로 두고 싶지 않은 사람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카일 아이들먼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남들의 상처를 나 몰라라 하고, 교회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다가 도착해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차에서 내리고, 규칙을 만들어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바로 번득한 삶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빚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우리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꼼수를 부리고,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기 위해 매일같이 야근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까지 반납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벽에 구멍이 뚫리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남들보다 잘 사는 척하기 위해 밤낮없이 소셜 미디어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허상에 빠져 사는 사람, 고통을 감추는 전문가, 약물 남용자, 빚의 노예, 맹목적으로 유행을 좇는 사람, 외로운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이 복음은 바로 자기 심령이 완전히 파산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깨어진 것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품으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작업을 하신다. 그분은 깨어진 것을 아름답게 고치는 걸 즐기신다.
예화) <깨어짐> (Lord, Break Me)란 책에서 윌리엄 맥도널드는 물질 세상에서는 깨어진 것이 가치를 잃는다고 말한다. 유리컵이든 접시든 깨어진 건 버려진다. 흠집이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깨어진 것이 귀하다. 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능력을 드러낸다.
한번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 다음 지시를 기다리게 하셨다. 예레미야가 그곳에 도착해보니 토기장이가 부지런히 녹로를 돌려 그릇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그릇이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개의치 않고 진흙을 다시 주물러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렘 18:4) 만들기 시작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8장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망가진 토기를 버리지 않고 다시 녹로를 돌리시는 토기장이 하나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인가. 토기장이는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또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 같은 진흙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그릇이 된다. 망가진 진흙 한 덩이가 예술로 승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다. “하나님, 제 깨진 조각을 당신 의견에 좋은 대로 다시 빚어주십시오.”
예화) 킨츄기 도자기 (일본에서 1,500년에 걸쳐 발전해 온 도자기 보수 기술) - 사진
원래 망가진 것을 보수한 물건은 싸게 팔리지만 킨츄기 도자기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깨지기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서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비싼 도자기를 깨서 금으로 보수하는 수집가도 많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천국에서도 깨어진 것이 가장 귀하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능력이다. 우리가 마침내 자신의 끝에 이르러 깨어진 조각을 내어놓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빚어 주신다. 이사야 53장 5절은 우리의 깨어진 상태를 십자가의 시각에서 보게 해준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53장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beautifully broken church가 되었으면 좋겠다. “심령이 가난한자, 파산한 자, 깨어진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우리의 깨어짐을 올려드리고 그래서 다시금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생으로 빚어주시길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