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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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28:1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출 28: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출 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출 28:4 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출 28:5 그들이 쓸 것은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이니라
출 28:6 그들이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에봇을 짓되
출 28:7 그것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출 28: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
출 28:9 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출 28:10 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출 28: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출 28:12 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출 28:13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출 28:14 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New Identity
-배곧동산교회 평일저녁기도회(21.10.07.목)-
들어가는 말
제가 고등학교 때 해군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해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해군 장교들이 입는 정복이 너무 멋있어서 그랬던 건데요. 해군 정복 사진을 한 번 띄워주시겠습니까? 엄청 멋있죠? 이 사람이 지금은 화가인데, 예전에 모델로도 활동을 했었습니다. 이 사진은 이 사람이 실제로 군생활 할 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엄청 멋있죠? 아무튼 저는 장교가 이렇게 정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해군 장교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해군사관학교에서 자료도 좀 찾아보고 했었는데요. 결론적으로는 해군사관학교는 아예 지원도 안 했습니다. 제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제가 해군정복을 입으면, 방금 보여드렸던 군인처럼 멋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안 갔습니다. 좀 더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 이 맘 때 쯤이면, 배곧동산교회에 와야 할 거 같아서, 해군사관학교를 안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옷은 우리 삶에서 참 중요하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주’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옷, 음식, 집이죠.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로 표현하여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이나, 서양에선 식의주로 표현을 합니다. 안 입고는 조금 버틸 수 있는데, 안 먹고는 조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식의주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곤궁한 상태를 표현할 때도 조차도, ‘헐벗고 굶주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헐 벗은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굶주린게 중요할까요? 굶주린게 훨씬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헐 벗은’ 상태를 먼저 표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옷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기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옷의 첫 번째 기능은 신체 보호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에의와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 유교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옷은 신분을 표현하기도 하고, 예의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옷은 개성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입는 옷은 ‘우리의 존재’와 ‘자아’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수단이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옷을 사는데, 굉장히 많은 돈을 씁니다. 자신을 조금 더 멋지고, 세련되게 표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 과소비를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정반대로 옷을 사는데 전혀 돈을 안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껍데기가 중요한게 아니다. 사람은 성품이, 내면이 주요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옷이나 외무를 꾸미는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사고와 사유, 인간의 정신세계에 집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옷에 과소비를 하는 사람들과 정반대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옷을 사기 위해, 과소비를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옷에 돈을 전혀 안 쓰는 사람들 조차도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표현의 기능을 합니다. 나는 옷을 통해서 나를 꾸미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생각이 옷을 통해 표현된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옷은 인간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야기!
오늘 본문 또한 옷에 관한 이야기이죠. 특별히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의복을 통해서 아론에게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형 아론을 위해서 거룩한 옷을 지어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아론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수여하시기 위한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론에게 주시는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1) 영화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겠다.
출 28: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만들어라. 내가 그 옷을 통하여 아론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의복’을 통해서 아론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까요? 제사장의 직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제사장의 직분을 행해야 한다.
출 28:4B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하나님이 아론에게 옷을 입혀서 거룩하게 하는 이유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한 선결 조건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론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성막 사건은 25장부터 31장, 35장부터 40장. 이렇게 두 군데에 걸쳐 있습니다. 앞선 25장에서 31장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에 관한 이미지를 보여주시고, “이렇게 성막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명령입니다. 반면에, 35장에서 40장은 성막을 실제로 짓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금송아지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1.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다. -> 에배의 대상 / 결론적우로, 아론이 우상숭배를 했다는 견해.
2.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표현한 거다 -> 예배의 방법
-> 결론적으로, 어느 쪽이 되었든 “예배에 실패한 겁니다. 32장 바로 앞에,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31장 성막 내러티브를 마무리 하는 본문에,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 것은 성막의 중요한 기는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 예배에 실패한 최초의 사람으로 묘사가 되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모습이라면, 아론의 실패로 / 아론 대신에 다른 사람을 세운 게 더 합리적인 그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에 기초를 세워가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떄문이죠.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아간이 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이 처음 세우지려는 시점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예배를 집접해야 하는 대제사장 후보가 예배에 실패한 겁니다. 자격 미달이란 뜻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아론은 자체로는 존귀하지 못한 자이나, 하나님께서 입혀 주실 옷.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거룩한 옷을 입으면, 거룩하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이렇게 대제사장 의복을 입힘으로서, 아론을 거룩한 존재로 만드십니다.
사실 이게 옷의 첫 번째 기능입니다. 아까 설교 서두에는 옷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고, 옷은 표현의 기능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인류 최초의 옷은 아담과 하와가 잎은 가죽 옷이죠.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는 기능을 했습니다. 옷이 가장 본래적인 기능이 수치를 가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아론의 수치를 가립니다. 수치를 가릴 뿐만 아니라, 거룩하다. 영화롭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아론이 입은 옷은 홍색, 자색, 청색 실에, 금실이 추가가 됩니다. 성막을 지을 때, 사용되는 재료가 그대로 사용이 되면서, 아론이 성막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황금빛이 나는 ‘금’실을 추가하면서, 아론을 빛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출27:20-21]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에 들어갈 ‘기구’들과 ‘성막을 짓는 방법’을 설명하신 다음에, 성막을 관리할 사람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임명하십니다. 그 후에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그 일을 수행할 때 입어야 할 “제사장의 옷”을 지으라는 겁니다.
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 옷을 입고, 제사장이 되었다. 너희는 자체로는 흠이 있지만, 이 옷을 입음으로 너희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 거룩한 존재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 수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의 본연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시죠.
출 28:1 하반절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제사장의 본연의 임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을 위한 일들을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돕죠.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제사장이 굉장히 중요한 존재이고, 제사장이 하는 일들의 사람들에게 참 많이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장의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옷을 보면, 보석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깁니다. 호마노 두 개에다가 나이 순서대로 각각 여섯 이름씩 열 두명의 이름을 새깁니다. 또한, 판결 흉패에는 보석 12개에다가 각각 한 지파씩 새깁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의 첫 번째 사명,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다 보니,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우리들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성막을 관리하라고 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시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체성을 부여하시기 위해,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영화로운 존재로 높이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고, 새로운 존재로서 정체성을 부여하십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종교개혁 최대의 유산 중하나가 이 만인제사장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세워진 겁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우리 각자의 삶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우리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로서, 제사장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겁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데, 그냥 만들지 않습니다. ‘성령의 영’을 받은, ‘지혜의 영’을 받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최초로 성령을 받은 존재로 나타납니다.
출 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경에서 성령을 받은 최초로 사람은 아담도,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족장들도 아닌, 성막과 기구, 의복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짓는 이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은 육체 노동은 굉장히 숭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땀을 흘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삶은 유교 문화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보다는 문이 더 귀한 취급을 받습니다. 노동은 천한 것들이 하고, 양반들은 책을 통하여 머리로 일하는 것이 훨씬 더 고귀한 삶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지금도 영향을 미쳐서 직업을 고를 때, 소위 ‘화이트 칼라’라고 불리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블루칼라이지만, 내 자식 만큼은 화이트 칼라로 키우겠다는 마음이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블루 칼라’는 어딘가 폼 나지 않고, 가오가 안 선다는 사상이 우리 문화 가운데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제가 마트에서 일을 하다가 처음 전도사로 교회에 출근을 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아, 나도 이제 양복입고 일하는 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저희 어머니에게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양복 입고 다니니, 뭐라도 됬다고 착각하지 마라. 너 정신 안 차리면, 내가 가장 앞장서서 너 사역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을 들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물론,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 귀천이 없다고 미화하면 안 되겠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야겠다. 그래서, 나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야겠다. 물론, 좋은 마음이죠. 그런데, 그 보다 더 먼저 선행되는 마음이,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본문과 관련된 많은 주석이나 설교들은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 엄청 집중을 합니다. 이 옷이 우주를 담고 있는 옷이니,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옷이니, 하면서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 엄청 포커스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최고의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빅터 헤밀턴이란 신학자는 오늘 본문 출애굽기 28장 1-24절을 주해하면서, 에봇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이 옷에 만드는 사람들에 더욱 집중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 28장 1-14절. 빅터 헤밀튼. 출애굽기. 도서출판 솔로몬.
“성경은 족장,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의 일을 하는 사람만큼이나 ‘노동자들의 기술과 일을 거룩하게 하신다. 손으로 일하는 것은 머리로 일하는 것만큼 성스럽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계조작과 직조에 뛰어난 것은 법을 만들거나 설교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랑하는 배곧의 성도 여러분. 공사현장에서,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복사와 같은 단순 업무를하면서, 또는 어느 건물의 청소를 하는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저도 사역을 하면서, 아웃백에서 야간에 청소 알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장님도 교회를 다니시는 분이고, 제가 전도사인걸 아시는데도. 저를 짜증나게 하면, 화가 막 머리까지 솟습니다. 아니, 뭐 어쩌자는 거지?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악독한 고용주나, 못된 직장 상사를 만나면, “내가 만만해 보이냐, 어디 한 번 해보자. 너 죽고 나 죽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솔직한 우리 심정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같은 실수는부족한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분들이시니, 넉넉히 이겨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은 옷은 굉장히 값비싼 옷입니다. 보석이 엄청나게 달려있습니다. 계산은 해보지 않았지만, 돈으로 따지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값이 나갈 겁니다. 샤넬, 알마니, 등등 온갖 명품을 다 갖자 붙여도, 호마노와 열두 보석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닐 걸요. 대제사장 옷이 훨씬 비쌀 겁니다. 아론은 그 옷을 입고 대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입은 그 옷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보다 훨씬 값질까요? 아론이 모세 시대를 살며, 대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아서 그 옷을 입으라고 하니까 입었지. 만약에 아론에게 대제사장의 옷과 그리스도의 옷.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걸 선택할까요? 그리스도의 옷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는 모든 삶의 현장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제사장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제사장적 존재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하는 모든 일들은 소중한 일이고, 존귀한 일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니까요.
옷은 언제 입는 건가?
우리가 이쯤해서 한 번 생각해 볼 일은 ‘그 옷’은 언제 입는 건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장교들이 입는 ‘정복’에 대해 이야기를 햇습니다. 정복이 너무 멋있어서,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었죠. 장교들은 정복을 언제 입을까요? 장교들은 정복을 굉장히 중요한 날에 입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합니다. 국가 연례 행사가 있을 때 입습니다.
아론은 어떨까요? 그는 이 대제사장의 옷을 언제 입어야 할까요? 매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대속죄일에는 그 옷을 벗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레16:3-4]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세마포도 막 싸구려 옷은 아니죠. 세마포도 귀한 옷입니다. 그런데, 세마포는 데제사장만이 입는 옷은 아닙니다. 세마포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반면에, 대제사장의 옷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죠. 대세장이 입는 이 옷이 훨씬 귀하고, 값진 옷입니다. 그런데, 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대제사장’의 옷이 아닌, 아무런 문양도, 자수도 없는 단조로운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할까요?
지성소는 하나님을 알현하는 장소입니다. 일년 중 딱 하루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론이 하나님을 알현하는 지성소에,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은 ‘아론’ 또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죄를 씻음받아야 하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아론이 평소에는 1년 364일 동안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 열심히 봉사하고, 일했지만, 지성소만큼은 / 지성소에서 만큼은 /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직분 다 내려놓고 / 그 옷 벗고 /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물론,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자격 때문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법궤 앞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속죄소 앞에 섰을 때는 대제사장의 옷이 아닌,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는 이유는 아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이죠? 반대로 생가하면, 아론이 거룩하지 않다는 거죠. 아론이 거룩하지 않으니까, 거룩한 옷을 입혀서 거룩해 보이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아론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은혜입니다.
성막 스토리는 출애굽기 25-40장까지 이어지는데, 중간에 32-34장은 성막 네러티브가 아닙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죄를 짓고,무너진 언약을 다시 세우는 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에배에 실패한 것.
여호수아를 생각할 때, 아간을 생각할 때.
이정도 케이스이면. 아론은 안 되겠다가 정상. 그런데, 아론은 대제사장이 됨.
아론은 거룩하지 ㅇ낳지만, 대제사장의 옷. 거룩한 옷. 황금옷을 통해서 너를 거룩하게 해주겠다는 하안미의 선언. 한나님의 약속.
그래서 아론 그 자체는 거룩하지 않은 존재임이데 불구하고, 거룩한 옷을 입고, 대제사장의 직물르 감당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이지만, 아론이 그 옷을 벗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 하나님을 알현하는 장소에서 / 하난미과 1대1로 교제하는 장소에서 / 나닌 거룩하지 앟은 조인 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ㅏㄹ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들어갈수 있는 자리이지만 / 대제사장이 아닌. 아론대 하나님으로 만난단느 겁니다.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도 꼴에 목사라고 / 목사다운 모습이 나타나야 하지 않나 하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강단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제가 지금까지 기도를 해온 역사들이 / 시간들이 /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의 세월이나 연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면, 사실 기도가 된느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더 많아요. 그런데 같이 기도하시는 집사님들은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큰지, 기도할 때마다 우시고, 엄청 큰 소리로, 저보다 훨씬 더 크게, 더 길게, 더 깊이 있게 기도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무릎 끓고 앉아있으면,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식이 될 때가 있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좀 더 신령해 보여야 하지 않나? 더 깊어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상당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목사가 아니라, 전인성으로 나아오길 원하실 꺼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목사로, 장로로, 구너사로, 집사로 나아오는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 그 인격으로 나나오길 원하실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호해주실 겁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를 볼 때, 조인 전인서잉 아니라,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그시르도로 볼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나가ㅏㄹ 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대담하게 나아가야 하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요. 라고 나가는게아니라. 하나님 저는 연약한 죄인입니다. 라는 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칼빈은 / 사실 저는 칼빈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칼빈인지, 스펄전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간에, 어떤 뛰어난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사람이 있느데요. 그 사람은 설교를 하러 올라가지 전에, 설교단 맨 앞에 앉아서.
“주님, 저도 저기 있는 저 사람들 중에 하나 임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제사장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을 통해서 주님을 에배해야 하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본연의 임무는 한나미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빈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만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모든 어깨의 견장 다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임음 기억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