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인 성품

베드로전서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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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만유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니까 세상의 어떤 권세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로 모시니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이 그리스도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건 세상에 대단한 빽이 있어서 생기는 담대함이 아니라 내게 금권이나 권력이 있어서 생긴 담대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실 때만 생기는 담대함, 세상의 원리를 초월한 신적인 담대함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해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이 이후에 어떤 상황을 맞이하는데 15절에 보시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상황입니다. 이건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는데 본문에 쓰인 대답하다는 동사 아폴로기아는 모욕적이고 조롱하는 상황에서 대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해졌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관해서 모욕적이고 조롱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담대하니까 그 질문에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합니까? 아닙니다. 즉흥적으로 말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말을 대답합니다. 준비된 말이라 함은 싸우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 대답을 준비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데 바로 온유와 두려움입니다. 온유는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참아주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두려움은 뭐겠습니까? 아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이 두려움은 그 두려움과 다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복음을 잘 대변해서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담대함이 생겼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 가운데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배짱에서 나오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때, 신적인 두려움이 생길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적용)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두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나름대로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핍박당하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상황을 만납니다. 그 때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내가 마음에 그리스도를 진정 주로 모실 때 생기는 신적인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만유의 주님을 모시니까 나를 예수쟁이라고 핍박하는 직장 상사, 주변 지인들, 만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적인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비꼬울 때 온유함으로 또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이랑 싸움하고 싶은 용기가 아닌 신적인 담대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신적인 담대함으로 나에게 오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2- 신적인 양심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전환문장) 이제 우리가 악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악 그 자체, 핍박 그 자체를 이겨야 할 차례입니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신적인 양심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또 뭐하러 신적인 양심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아까전이랑 같은 논리입니다. 이 양심은 세상에서 착하게 산다고 얻는 일반적인 양심이 아니기 때문에 ‘신적’이라는 말을 붙여봤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베드로 사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온전히 선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양심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양심은 선한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해서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양심입니다.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의미에서의 양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고 죄를 경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래 양심은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타락함으로써 양심이 그 기능을 상실해서 일부 기능만 발휘합니다. 그래서 착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는 정도 밖에 못합니다. 불신자중에 착한 것과 악한 것을 꽤 잘 구분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 기능이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쨌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신자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양심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고 실천할 수 없습니다. 수행을 많이 쌓은 승려의 양심이나 동네 건달의 양심이나 우리가 볼 땐 하늘과 땅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가진 양심은 시편 51편에 다윗이 구하는 정한 마음과도 같습니다. 원래 우리는 망가진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구원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워진 양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양심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이 양심을 신적인 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양심을 우리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절 본문에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의 명령은 간단하게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을 부끄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합니까? 우리의 권세와 물질과 지성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겠습니까? 이런 방식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쓰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방법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가진 양심과 질적으로 다른 양심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적인 양심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기능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 받은 자만 얻을 수 있는 신적인 양심입니다. 망가진 양심이 신적인 양심 곁에 있으면 부끄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최소한의 양심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성격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면 안된다던지 간음을 하면 안된다던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법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법 앞에 신적인 양심과 세상적인 양심이 딱 서면 세상적인 양심이 기능과 수준이 약하기 때문에 신적인 양심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과 양심은 서로 맞대면 공명합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서로 반응을 합니다. 불신자의 양심을 신적인 양심에 대면 당연히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럼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불신자의 양심이 이끄는 삶과 신적인 양심을 지닌 성도의 삶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신자의 행위를 비방했던 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이 됩니다.
(증명)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불신자들은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 혹은 그래도 적정선의 착한 일을 하자 이정도의 양심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신자의 신적 양심은 이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불신자가 봤을 때는 조금의 거짓말도 못하고 타협도 못하고 쓸떼 없이 겸손을 떠는 너무 바보 같은 삶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신자의 양심과 신자의 양심이 서로 부딛혀서 반응을 일으킬 때 불신자는 생각합니다. 저 사람의 삶은 뭔가 다르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내가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나는 저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한 번씩 경험하신 것처럼 너 하는 거 보니까 나도 교회 한 번 가고싶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어떻게 하면 이런 신적인 양심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우리의 양심이 신적인 양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신적인 양심이 더 강해져야 합니다. 양심은 어떻게 하면 강해집니까? 시편 26:2에 보면 주의 교훈이 양심을 단련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또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양심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양심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에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정한 마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양심을 연단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우리는 말씀을 진정으로 받을 때 그리고 처절한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양심을 강화시킵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내가 신적인 양심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불신자의 양심을 감화시키고 부끄럽게 하기에 모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쇠를 담금질해서 강력한 도검을 제작하는 것처럼 기도의 용광로에 우리의 양심을 넣고 말씀의 망치로 우리의 양심을 두들겨야 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양심의 대장장이가 되셔서 교회라는 대장간에서 우리 양심을 계속 연단시키십니다. 이게 그렇게 재밌기만 한 과정은 아닙니다. 뜨겁고 아프고 지루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양심이 강화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해지고 죄를 더욱 잘 경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생깁니다. 마치 명장이 달구고 두들긴 검이 명검이 되어서 극한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양심이 날카롭고 단단한 명검이 됩니다. 세상의 양심을 찌르고 베고 이기는 강력한 영적인 무기가 됩니다. 우리의 신적인 양심이 이런 명검이 될 때 세상을 부끄럽게 하여 세상을 이게 될 것입니다.
(전환문장)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신적인 성품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신적인 성품은 첫 번째로 신적인 담대함입니다. 만유의 왕께서 우리의 주님 되시기에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됩니다. 담대하지만 세상 속에서 분쟁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복음을 조롱할 때 준비된 대답으로 대답하는 여유로운 담대함입니다. 온유함으로 참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그 대답한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담대함입니다.
신적인 성품 두 번째는 신적인 양심이었습니다. 구원받으면서 얻게 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그런 양심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단련되어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런 양심입니다.
이번 한 주도 신적인 담대함과 양심으로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세상을 상대하고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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