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수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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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 전 찬송 341(십자가를 내가 지고) / 339(내 주님 지신 십자가)
찬송 452(내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 324(예수 나를 오라 하네)
본문 마16:24-25 (신p.28)
제목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서론]

지난 삼일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여러분들, 열심히 살아오셨는가? 주님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는가? 저를 비롯해서 누구라도 이 질문앞에서 당당하게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또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는 것,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저와 여러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자라고 해서 신자,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 해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떤 삶이 신자다운 삶이며, 도대체 어떤 수준이 그리스도인 다운 것일까? 오늘은 이에 대하여 말씀을 선포하려 한다.

[본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그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일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요,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다. 이해 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곧 오늘 우리의 정체성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삼으신 그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목적이요 우리의 정체성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자로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제서야 주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며 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본문 21절 말미에는 이를 ‘비로소’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때로부터, 그제서야’ 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시기까지 인내로서 기다리셨고, 그들이 바른 고백을 한 이후에서야 메시아의 참된 사역, 즉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구약은 메시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해 수많은 곳에서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본질적으로 어떠한 분이시고, 이 땅에 어떤 혈통으로 나시며, 장차 무슨 일들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해 접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는 그들의 정치적인 야욕과 어우러져, 진정한 메시아의 의미와는 너무나도 멀어져버렸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께서 이 땅에 도래하실 때, 자신들을 억압하던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세계강국으로 우뚝 세우실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구약의 여러 메시아 예언장들을 접해왔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동떨어진 메시아는 필요하지 않았다. 영광과 번영의 메시아는 필요했지만 고난과 수치와 죽으심의 메시아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말씀하신 이후, 베드로가 보여주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기록한다. ‘항변하다’라는 의미는 ‘못마땅한 생각이나 반대의 뜻을 주장하다, 항의하다’ 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본래 원어의 의미는 ‘책망하고 꾸짖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의미를 살리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아이고! 예수님! 말도 안되는 소리좀 하지 마세요! 그게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립니까?’ 그는 창세전부터 성부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편,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모든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정결하게 하고 그분의 소유요 백성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거부하고, 오히려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책망하고 꾸짖었던 것이다.
여러분, 다른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내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내 꿈과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굶주린 배도 만족할 정도로 채워주시고, 또 눈 앞에서 이적도 경험하게 하시며, 좋은 말씀도 가르쳐주시고, 또 주님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의 존경어린 시선들도 경험하고, 어깨에 힘도 조금씩 들어가게 되고, 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이 세상의 왕위에 오르실 때 그 곁에서 한 자리나 차지하면 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러한 대목은 마18장의 ‘큰자 논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참되게 고백하였지만, 여전히 그들 안에는 예수님을 다른 우상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섬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람의 일, 곧 욕망에 사로잡혀 주님을 책망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소원을 성취하려 하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이루고싶은 것들을 이루는 도구로서 하나님을 사용한다면, 즉 나의 신앙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맞춰져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시지 않을 때, 주님께 항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책망하는 지경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만약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지 않으셨더라면, 그래서 그 살이 찢기지 않으셨더라면, 그리스도께서 나무 위에 달리지 않으셨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철저한 죄인으로서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임할 결과는 너무나도 끔찍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와 같은 수난과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약속 밖의 사람들처럼 여전히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좇아 살아갔고, 아무런 소망 없이 세상의 허망한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애썼을 것이다.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사람은 더욱 심한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내 속을 채우려하면 할수록 더욱 심한 공허함만이 찾아올 뿐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에 참된 만족을 줄 수 있겠는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발목을 잡으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라고 엄히 꾸짖으신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매우 심오한 말씀을 주시는데, 2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옛사람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받기 이전의 옛사람이 추구하던 것들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설명하며,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본래의 것들에 대한 모든 신뢰를 포기하고, 구원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 한분께로만 매달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닌 그 외에 모든 신뢰할만한 방법과 수단을 배제하는 것, 설령 그것이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모두 배제키시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 당대에 십자가 처형은 사형의 가장 잔혹하고도 두려운 형태였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럽고도 끔찍한 방식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나무 위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 처형은 매우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 중에 하나는 어려운 일이나 힘든 헌신의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이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내가 조금 더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생각과 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일에 나 자신을 온전히 굴복시키고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모범이 되시지 않았는가?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는 궁극적인 모범이 된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모습처럼, 오로지 하나님의 일만을 중심으로 둔 완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특별히 25절 말씀을 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일상 중에 ‘잃어버리다’ 라는 단어를 언제 사용하는가? 내가 뭔가를 의도해서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 이를 두고 내가 몇날 몇시에 어느 장소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릴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버린 셈이 된다. 한글에서의 잃어버렸다는 것은 뭔가 수동적인 뉘앙스가 난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잃어버리다'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파괴하다, 손상시키다’ 라는 의미이다. 즉, 적극적인 뉘앙스이다. 한글번역과는 많이 다르다. 잘 들으라.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과 생각으로 구원을 이루려하는 사람이다. 내가 앞날을 계획하고, 내가 미래를 그리며, 궁극적으로 내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방법을 고수하고 자신의 틀 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주님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없이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주를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결국은 그 유한한 생명 마저, 그 보잘것 없는 남은 생명마저 하나님에 의하여 파괴될 것이다. 산산히 부숴질 것이다.
반면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셨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자기 몸에 상처를 입혀 자기 생명을 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24절의 말씀의 맥락으로 연결시켜서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 관련된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 힘을 빼는 것이다. 내가 뭔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관심이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살려고 해봐야 주님이 살려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내가 뭔가를 이루려 하여도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은혜 충만하려 해도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충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에 빠진 자가 발버둥을 치고 악착같이 살려고 뭔가 움직이면 누군가 구조해주는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다. 나를 건져줄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고 내 몸에 힘을 빼는 것이 사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순종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가? 우리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참 길이요, 참 진리이며, 참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을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예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말만 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 합당한가? ‘예, 주님 따라가긴 하겠지만 지금 하던 것들만 완수해 놓고 따르겠습니다' 라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합당한가.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고백하며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푯대가 되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조금 더 의미가 와닿게 의역하자면, “나를 따르려 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나를 따라야만 한다!” 이 구절에 대한 아주 적합하고도 훌륭한 성경주석은 바로 갈2:20 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즉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못 박히는 삶이다. 내 모든 욕망들과 죄성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이 날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와 같이 날마다 나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여야만 하는가? 내가 죽어야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야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게 거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곡을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하덕규씨는 본래 이 ‘가시나무’ 라는 곡을 ccm으로 만들었었다. 그 가사가 어떠한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 당신의 편할 곳 없었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시인은 주님께서 편히 거하실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에 아직도 수많은 내가 살아있음을 탄식하고 있다. 내 속의 무수한 악한 것들이, 그많은 헛된 바램들이 마치 메마른 가시나무가 되어서 쉴 곳을 찾아 날아온 어린 새들조차도 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려서, 도저히 주님께서 거하실만한 공간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곡이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지는 않는가? 우리의 마음 속 공간에 여전히 주님 외의 것들로 가득차 있어서, 온갖 세상적이고도 죄악된 것들로 꽉 차 있어서, 내가 여전히 십자가를 지지 못해서, 여전히 내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서,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전히 따르지는 못하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죄악된 본성들, 이 세상의 허망한 것들을 좇는 나의 육신의 정욕들과 안목의 정욕들과 이생의 자랑들, 여전히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며 주님을 밀어내는 죄악된 생각들, 온갖 무가치한 생각들, 미신적인 생각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 주님보다 더 관심을 쏟아내는 정욕적인 것들, 주님보다 더 신뢰하는 세상의 수환들, 주님을 믿지 못하고 이래저래 인간적인 머리로 계산하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들이 우리 마음의 공간 안에 가득차 있지는 아니한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감에 있어서도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들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 대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들로 꽉 차 있으며, 칭찬받고 높임받고자 하는 마음들, 섬기려 하기 보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들,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존귀와 명예의 자리로 내가 올라서려는 마음들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차 있지는 아니한가.

[결론]

결론이다.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피값으로 사신 바 된 여러분, 주님께서는 남을 부인하라 말씀하지 않았고, 남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지 않았다.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한다. 이 십자가가 너무나도 무겁고 골고다까지 걷는 그 길이 너무나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대신 지어줄 수 없다. 내 몫이다. 내 마음 속 공간들을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악한 것들, 세상의 정욕과 허황된 자랑들을 좇던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주를 위하여 계속해서 나 자신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아 나를 부인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영생을 찾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죽으라.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여러분 자신을 못 박으라. 내 안에 악한 정욕들과 온갖 더러운 것들 발견될 때마다 지속적으로 못 박아 죽이라. 죽여야 산다. 우리 각자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드러난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를 기억하며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이 자리의 모든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
사실 본문의 말씀은 다들 아시는 말씀일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며 주님을 좇는 삶.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알고는 있지만 얼마나 이 말씀에 순종했는지를 돌아보자. 지난 주일 목사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울린다. 설교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능력이 있으려면 먼저 설교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말씀을 준비하며 다시금 그렇게 살 수 있길 소망했다. 나부터 순종하려 한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에 동참하지 않으시겠나. 말씀을 붙들며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를 따르기로 함께 결단하지 않으시겠나. 주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그가 누구라도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어 주를 따르라 하셨다. 이를 통해 나는 죽고, 예수로 충만히 살아남을 말씀을 통해 들었다.
우리가 이 시간 합심하여 함께 주님께 부르짖길 원한다.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내가 말씀 앞에 죽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모임들이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교회의 유년부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날마다 십자가 보혈로 죽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내 안에, 우리의 모임에, 우리의 교회 구석구석에 오직 예수만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예수만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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