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위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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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1-7

엘리바스의 변론에 이어서 수아 사람 빌닷이 변론을 시작합니다. 빌닷의 변론의 요지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한 데 대하여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 자신의 죄이든 자녀들의 죄이든 죄의 결과이며, 욥이 잘못을 회개하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인과응보적인 변론과 비슷합니다.
먼저 빌닷은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원망한 데 대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지 않는 무엄하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으로 규정하며 책망하고,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바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단정적으로 말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본문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느냐?”란 말은 6, 7장에 나타난 욥의 반박과 기도를 평가 절하하는 말입니다. 빌닷은 욥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욥의 말을 ‘거센 바람'에 비유합니다. 영어로는 ‘a blast wind’ 광풍이란 ‘루아흐 캅비르'는 ‘강력한 바람'을 뜻하는 말로 광야의 낮과 밤의 큰 일교차에 의해 발생하는 회오리 바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빌닷이 욥의 말을 광풍에 비유한 것은 강력한 바람이 인간의 거주지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것처럼 욥의 말이 매우 거칠고 파괴적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분이 맞습니다. 단편적으로 보면 빌닷의 말은 맞는 말이고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빌닷의 문제는 앞선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이를 현세적이고 도식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제한시켜서 이해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의 완전한 실현은 개인적으로는 내세,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해서는 세상 역사가 마무리되고 완결되는 최후 종말의 시점에 이루어집니다. (불의한 자가 성공하고 흑인의 인권, 북한만 보아도, 아프가니스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기계적으로 욥에게 적용하여 욥이 당하는 재난이 그의 범죄로 말미암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욥을 정죄하는 빌닷의 논리는 합당하지도 않고 나아가 욥의 상황과도 맞지 않는 불합리한 주장입니다.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빌닷의 하나님 공의에 대한 단순한 인과응보식 논리에 의한 변론의 연장선상입니다. 이번에는 자녀들이 죄를 지었기에 다 심판을 받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답시고 정작 하는 말들이 너무나도 끔찍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비참함 죽음 앞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욥에게 모든 것이 자녀들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빌닷의 이 말은 그토록 비참한 고통 중에 처한 욥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대는 잔혹스런 언행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녀들이 설혹 알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하여 정기적으로 그들을 성결케 하는 제사까지 드린 욥에게 있어 이 말은 결코 수긍할 수 없는 일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예화) 저도 어릴 때부터 이런 인과응보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주의 종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말로가 항상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녀가 아프거나 병이 들면 부모님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성도들의 가정에 우환이 끊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보면 정말 그런 경우도 보았습니다. 하나님 뜻이 아닌데 자꾸만 불순종하다가 결국에 사고가 나고 불구가 되어서 다시 주께로 돌아온 간증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인과응보식 사고에 젖어서 저 높은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제한하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좁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욥을 봐서도 그렇고,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는 기사에서도 때로는 고난과 고통이 단순히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넓으신 뜻 안에서 해석해야 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25cm 후라이팬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어서 빌닷은 욥에게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사업장이나 식당에서 가장 많이 보는 구절의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마냥 좋은 구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절은 앞선 5, 6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즉 본문은 욥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조건이 충족될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재앙을 돌이키시고 그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자녀와 재산을 크게 번영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미약하엿으나'는 욥의 현재 상태를 반영한 말이고, ‘창대하리라'는 욥이 회개할 때 받을 미래의 축복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말은 욥이 죄인이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영적 회복보다는 물질적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 구절 자체만 보면 은혜가 되지만 이런 상황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을 쉽게 벽에 걸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
엘리바스와 빌닷을 보면서 정확한 말도 위로를 못해주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 경우에는 더더욱 말을 조심해야 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 진짜 위로는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줄 때 위로가 되는데 왜 그것이 위로가 될까요?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해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함께 할 때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주님 하신 방법대로 하니까 위로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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