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02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17UNLIKELY
Conscientiousness
0.96LIKELY
Extraversion
0.54LIKELY
Agreeableness
1LIKELY
Emotional Range
0.71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마태복음 5:4
예화) “이것이 복음이다” (톰라이트)
가스펠은 ‘좋은 소식' good news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좋은 충고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여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아내 혹은 남편이 되는 것을 도와줄 기술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을 위해 당신을 바른 길로 가게 해 줄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이 충고를 받아들이십시오.
이 기도를 따라하고 구원을 받으세요.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충고이지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소식은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소식, 특별히 좋은 소식을 이해하려면 보다 큰 이야기 혹은 이전 이야기의 문맥 안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로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특별히 16강전, 이탈리아와 했을 때 경기를 교회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알다시피 이때 한국이 안정환의 골든골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우리 교인들끼리 얼싸 앉으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말그대로 좋은 소식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좋은 소식, 이탈리아에게는 거리끼는 나쁜 소식이다.
근데 일본에게는 어떻까? 자기 나라에 관심있지 사실 일본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소식은 일주일 내내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리고 소식이 하는 핵심 역할이 있는데, 한 이야기를 폭발적인 절정에 이르게 하고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게 하는 것이다.
바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갑자기 나를 포함한 수많은 소년들의 장래희망이 박지성 같은 선수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다른 예화로 넘어가보자.
이 예화는 예수님 자신이 그분의 좋은 소식을 들고 등장하신,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활동한 그 시간과 장소, 바로 초기 로마 제국의 세계가 배경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마도 로마제국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그는 공식적으로 황제였던 적이 없다.
기원전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적들이 누구도 절대 통치자가 되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제국은 혼란과 내전을 겪게 된다.
내전 초기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과 그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자 했던 이들 간의 대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복수를 위해 카이사르의 양자이며 상속자였던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친구 안토니우스와 연합했다.
그러나 연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이사르 암살범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물리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절대권력을 놓고 서로의 경쟁자가 되었다.
결국 둘이 싸우게 되고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안토니우스는 유명한 왕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집트로 도망친 뒤 거기서 둘 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제 이 기간, 곧 내전이 벌어진 13년 동안 당신이 로마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라.
전투는 비록 멀리서 일어나고 있지만, 도시 안에는 온갖 루머와 당파, 자리다툼이 가득할 것이다.
당신이 카이사르 집안의 친구, 즉 율리우스나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의 친구라고 가정해보라.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 소식일 것이다.
반대로 안토니우스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아주 나쁜 소식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소식이 들려온다.
“좋은 소식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그가 로마의 새 주인입니다!” 이것은 이제 막 일어난 어떤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당신에게 이제 곧 일어날 어떤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를 제국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통합해야 한다.
승리의 결과가 제대로 이행되도록 하기 위한 마무리 군사 작전이 수행될 것이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수도로 돌아와 자신이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포하기까지는 2년여의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 2년 동안 도시는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과 곧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식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일정 기간의 새로운 기다림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 시간 동안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안다.
당연히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친구들과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안토니우스를 지지한 사람들에게는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이제 막 일어난 일과 이제 곧 일어날 일 사이에서 도시는 살아간다.
당신과 당신 가족은 축하준비를 한다.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계획한다.
세상은 바뀔 것이다.
정말 어떤 면에서 최근의 승리로 인해 세상은 이미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이 달라졌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당장 모든 것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다.
->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의 시대에 이런 종류의 좋은 소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완벽한 역사적 사례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세상의 대부분을 다스렸고 헤롯은 중동 지역을 관할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집권하고 헤롯의 아들 중 하나인 안티파스가 중동 지역 통치자일 대 죽으셨다.
나사렛의 예수는 실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격변의 세월을 살다가 죽은 진짜 인간이었다.
그분의 메시지,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이라 불렀던 그분에 관한 메시지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근본적이고 영원히 바꾸고 계신지에 관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단지 좋은 소식 (simply, good news)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세상이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좋은 소식이 일어났다.
여기서 바울은 옥타비아누스 혹은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처럼, 메시아 예수께서 이미 세상의 주인이 되셧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반역 세력을 포함한 만물을 그분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는 일을 완전히 마치신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팔복의 말씀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 복 있는 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소식과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으며 그리하여 이제 자신들이 이미 승리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 시간 사이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상 나라는 부자, 권력이 있는자, 명예가 있는자가 복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를 통치하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4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메시지 성경 (ppt)
인생은 꿈을 깨는 사건을 가득하다.
나의 끝은 대게 내 꿈이 와장창 깨지면서 찾아온다.
부모가 당신을 앞에 앉혀 놓고 ‘이혼'이라는 단어를 처음 가르쳐 주었는가?
‘천생배필'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에게서 그만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는가?
사고가 났으미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는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직장이었는데 불합격 통보를 받았는가?
한창 즐거운 꿈을 꾸던 중에 현실이 당신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마치 괴한의 갑작스러운 난입과도 같은 순간이다.
깨어나는 건 곧 뭔가를 잃는 것이다.
돈, 건강, 직장, 순결, 혹은 특별한 누군가.
살다 보면 뭔가를 잃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신의 끝에 이르게 된다.
이 현실을 빨리 깨닫는 자가 현명하다.
예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다른 작가들과 점심 식사 자리에서 했다는 내기는 훗날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친구들은 헤밍웨이가 단 여섯 단어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데 10달러를 걸었고, 헤밍웨이는 그 내기에 응해, 냅킨 한 장에 다음과 같은 단어를 써 내려갔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ppt)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 이야기는 짧지만 감동적이다.
당신도 여섯 단어로 당신의 이야기를 써보지 않겠는가?
- 당신의 자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암이 치료에 반응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게 어때?
안타깝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제 나는 떠난다.
앞으로 우리는 남남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꿈을 꾸던 삶이 애통하는 삶으로 변했다.
하지만 상황이 반대로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애통이 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또다시 세상의 관념을 뒤엎으신다.
새로운 삶의 존재 방식을 알려주신다.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은 깊은 상실과 실망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소망과 구속의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신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
애통하는 자?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시던 때는 높은 유아 사망률과 짧은 수명, 굶주림, 질병, 국가적 굴욕의 시대였다.
따라서 청중의 대다수가 애통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렇고 말고요! 애통하는 게 최고로 복된 일이죠!”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리라.
예수님은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애통'이란 표현을 사용하셨는가?
첫째, 우리는 삶의 현실로 인해 애통한다.
원치 않는 일이 제멋대로 우리 삶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로 인해 내 삶이 엉망이 될 때가 있다.
통제 불능의 상황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자가 복이 있다니! 카일 아이들먼의 책에는 이런 예화가 나온다.
-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도 다시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알코올 중독자는 복이 있나니
직장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을 날을 손으로 헤아리는 가장은 복이 있나니
치매에 걸린 부모가 점점 스러지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는 자녀는 복이 있나니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단어에 실린 무게감을 정확히 짚어 냈다.
이것은 감출 수 없을 만큼 강한 슬픔을 의미한다.
또 마음을 아리게 할 뿐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슬픔을 가리킨다.
이런 슬픔에 무슨 복이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만사가 뜻대로 풀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나 ‘꿈꾸는 대로 다 이룬 자는 복이 있나니'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분은 우리가 애통할 때, 우리 삶이 극도로 힘들어졌을 때, 평생에 가장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우리 자신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때야말로 복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의 메시지는 복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복은 우리 안에서 나온다.
이 복은 내 꿈이 무너질 때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게 끝났을 때만 발견할 수 있다.
고난은 우리 영 안에 하나님의 평안과 임재의 복을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예화) 구약의 욥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이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 삶 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채우던 것은 물질이었을 수도 있고 관계였을 수도 있다.
대체물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가 아려울 때 하나님이 그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더 소중한 것으로 채워주신다.
둘째, 예수님께서 애통을 말씀하실 때 ‘죄에 대해 애통하라' 말씀하신다.
첫번째 종류의 애통은 외적인 파괴에서 비롯하지만 이 애통은 내적인 파괴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죄'라는 단어를 기피한다.
그러나 로마서 3장 말씀처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자꾸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생, 그 죄를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으셨는데 우리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전에서도 ‘죄'라는 단어가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도 분명히 ‘죄'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1,600년 전쯤,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에 이런 글이 있다.
“내 죄가 구제불능이었던 것은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에 직면해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 .5
.5 - .6
.6 - .7
.7 - .8
.8 - .9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