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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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계명
출애굽기 20장 3절
찬양 102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521 어느 민족 누구게나
369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인사
열 가지 계명 중 그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며 애굽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 구절의 원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에서, 나와 마주서서 다른 신들을 그 사이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결코 다른 신들에게 눈을 돌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 처소뿐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 전 영역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도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결코 다른 신들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 유목의 신과 풍요의 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1계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부터는 농경문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농경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바알(Baal)이라는 농경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바알을 풍요의 신으로서 농경 생활 중에서 특히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알 수 있듯이 농사를 지을 때 비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아무리 농사가 잘 되어도 비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양으로 내리지 않으면 그 해 농사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바알이 비를 관장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유목민이 아니라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삶을 살아야했기 때문에, 가나안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민족이 오랫동안 믿어 왔던 토속 신앙에 동화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확고하게 믿어왔던 농경 신 바알이 농사를 주관한다고 믿게 될 우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농경 생활을 막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섬겨왔던 여호와 하나님과 농사를 주관한다는 바알 신을 함께 섬기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신앙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신을 받아들여 양쪽을 모두 섬기는 이러한 신앙을 가리켜 우리는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러한 종교혼합주의는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 여호와께 도리를 다하는 동시에, 새로운 신 바알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혼합주의는 삶의 풍요와 안정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2.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형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악행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엘리야는 열왕기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외칩니다. “너희들은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따르라. 여호와와 바알 중 하나를 선택하라.”
엘리야라는 이름에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엘리야에서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리’는 ‘나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는 ‘여호와’의 준말입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1계명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행에 침묵하지 않고 그것을 죄라고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둘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하자니 다른 한쪽을 포기할 때 생기는 손실이 너무나 커 보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양쪽을 모두 섬기기로 결심함으로써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인 제1계명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3.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
21세기에 이르러 국가 간의 분쟁의 원인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경적적 이득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당시 미국이 북한도 공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역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라크에게서는 얻어 낼 경제적 이익이 있지만, 북한은 공격해 봤자 얻어 낼 경제적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시 의식 있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이면에는 석유 자원의 확보라는 경제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경제적 이권을 얻기 위해 중동 지역의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적 이득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수천수만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수십만의 죄 없는 생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지금도 21세기의 바알은 물질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경제적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명분을 만들고 생명까지 희생시키는 것이 이 세계의 질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돈은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핵심 가치가 되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Money’라는 말이 있는데,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 즉 물질만능주의는 알고 보면 물질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신앙은 영적, 정신적 가치가 돈, 물질, 경제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요한3서 2절) 그러나 바알 신앙은 모든 가치보다 돈이 우선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신앙, 바알 신앙 중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나 이야기) (정직한 공무원 이야기 - 세월호 사건) (예전에는 꿈은 훌륭한 사람, 의사가 꿈인 여학생 – 돈)
3. 까닭 없는 신앙, 까닭 있는 신앙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마음에 두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의지하는 것 혹은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돈, 권세, 명예, 건강, 자식, 평안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로마서가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모두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로 하나님을 대신한다거나 그것들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피조물을 섬기는 행위이며 우상숭배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5)
우리가 가장 쉽게 계명을 범하는 죄는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할 영광과 명예를 피조물에게 돌리는 죄인 것입니다. 교만은 자아를 우상으로 삼는 것이고 탐욕은 돈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며 정욕은 배를 우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존중하거나 사랑하고, 두려워하거나 섬기며, 기뻐하거나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근 것이 무엇이든 사실상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대 이야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주여 38년 된 병자와 같은 저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합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다른 생각에 빠져 예배를 드린 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그분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시간 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그분만으로 평안과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따른 이유는 바알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한 것은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모두 바알이 아닌 여호와로부터 온 것들이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호2:8)
여호와 하나님은 영적인 것뿐 아니라 물질도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질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물질은 우리가 추구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전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것들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 1계명 앞에 올바로 무릎 꿇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에서 사탄은 욥을 참소하면서,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9-10)
사탄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탄이 말하는 ‘까닭 있는 신앙’,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계산적인 신앙은 제1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지,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는데도 교회에 안다닌다. 베드로 기적의 교회) (행20:22-24) (윤성진 전도사님의 신앙)
3. 오직 하나님만
신명기 6장 전체는 제 1계명에 대한 해설입니다. 특히 신명기 6장 4-5절은 부정명령인 제1계명을 긍정명령으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여기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전적인 헌신’을 가리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도 왜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엉뚱한 것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신명기 11장 13-17절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우상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