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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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계명
출애굽기 20장 4-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인사
오늘 함께 나누실 말씀은 십계명 중 제 2계명인 출애굽기 20장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인데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형상 제조 금지
본문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새긴 우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셀’은 신으로 섬기려고 나무나 돌에 새겨 만든 그림을 가리킵니다. 나중에는 쇠붙이를 녹여 만든 모양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방신의 형상화를 가리키는지 여호와의 형상화를 가리키는지 본문에서는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성경학자들은 제 1계명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여호와의 형상화를 금지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기록된 출애굽기 20장 23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후대에 출애굽기 20장 4절을 해석한 신명기 4장 15-16절에도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는 내용으로 여호와의 형상화를 금지하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시내 산에서 드러난 여호와의 현존은 그분의 ‘소리’, 즉 ‘말씀’이었지 그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신앙은 귀로 듣고 믿는 신앙이지, 눈으로 보고 믿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때 자리에 없던 도마가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그들이 함께 있는 곳에 나타나셨을 때 도마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이렇게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본문 4절을 보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4절)라고 명령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하늘, 땅, 물속’이라는 세 가지 범주는 인간이 알고 있는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삼라만상의 어떠한 형상이든지, 하나님 대신 숭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하늘과 땅과 물속에 있는 형상을 본떠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신상에게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고, 음식을 대접하고, 그 신상으로 점술도 실행하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 가보면 나라마다 이런 우상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무당집 같은 곳에 가면 장군상 같은 것을 놓고 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하다고 진짜 그런가 하고 찾아가보지는 마시고요,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이 한국이민사회에는 무당집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한국 사람들이 이민 가서 사는 곳에는 교회가 제일 먼저 세워진다는 예기를 들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제 1계명에서 나타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는 내용과 제 2계명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내용은 매우 특이한 현상인데요, 고대 근동의 어느 종교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그림이나 형상들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따르는 신들을 형상화 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 형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가끔 이 말씀 때문에 인형이나 장식품 등도 우상이라고 해서 다 불태우거나 깨뜨려버리기도 하는데, 인형이나 장식품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의지하게 되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커플 링 같은 것에 소원을 빌거나 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인형을 가지고 소원을 빌거나 하면 그런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상이든지 그림이든지 어떤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형상들은 악한 영들이 틈탈 수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저희 집에 있는 동물 형상의 수저받침이나 장식품 등을 다 깨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대전 부모님 집에 있는 것까지 다 제가 버려버렸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진유에게 인형도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하도 사주고 싶다고 해서 토끼인형을 사주었는데, 그것을 깨물기도 하고 던지기도하고 꼭 끌어않기도 하고 잘 노는 모습을 보니까 참 사주길 잘했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진유가 어쩔 때는 저보다 인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상당히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그때는 인형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인형을 먼저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모가 인격적으로 아이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어려서부터 제대로 신앙교육을 시킬 수 없는 경우는 인형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보면 스마트폰 때문에 다들 몸살을 앓고 있는데요, 한국 같은 경우를 보면 지하철을 타면 빽빽하게 탄 수많은 사람들 중 거의 90%정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인데요, 그것으로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또는 게임 같은 것을 하는 데 5-60대 아주머니들도 게임에 빠져있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은데 그것 때문에 말씀 읽을 시간을 빼앗기고, 그것 때문에 기도할 시간을 빼앗기고, 그것 때문에 찬양할 시간을 빼앗긴다면 그것 또한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분들은 인터넷 금식, 스마트폰 금식, 미디어 금식 이런 것도 하도라고요.
또 어떤 이단들은 십자가를 우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 사용된 사형 틀의 하나로서, 온갖 질고를 지고 우리들의 죄를 위해 그곳에 처참하게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 다는 것인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초대교인들은 십자가를 보기만해서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의 상징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지 그것이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십자가나 십자가 목걸이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어떤 주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2. 질투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5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질투’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어감에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그것을 어겼을 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하나님으로서 찬송과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존경받지 못하실 때,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찾고자 하십니다. 이사야 42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송을 결코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간에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빼앗겼을 때 질투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14절과 신명기 4장 24절에서도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 (출 34:1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4:2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온전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신명기 6:4-5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하나님께서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또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은 죽음보다도 강한 질투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보다 강한 질투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런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더욱 뜨겁게 사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 가계에 흐르는 저주
제 2계명은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5-6절)로 종결됩니다. 이 구절에서 죄가 3-4대까지 이른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버지의 죄 때문에 3-4대에 걸쳐 불행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인 것 같습니다. 벌이란 죄 지은 사람이 받아야지, 그 죄와 무관한 자식과 손자들까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이 흔히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어서 그것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3-4대에 걸친 보복은 흔히 우리들이 오해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도 힘든 연단이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는데요, 이러한 생각이 책으로도 출판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론’은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자손 대대로 조상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4:16절은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신 24:16) 라고 기록합니다.
또 이러한 생각은 주전 597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에게도 있었는데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떠들어 대며,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의 죗값 때문에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부모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지적하십니다. 다함께 에스겔 18장을 보시겠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다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변리)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이자)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 이 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을 위하여 꾸이거나 이식을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정녕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비의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전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억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을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찐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그 아비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억탈하고 민간에 불선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찌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 (겔 18장)
이와 같이 벌은 죄를 범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받는 모든 징벌은 그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닌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를 3-4대에 걸쳐서 갚겠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3-4대란 당시 대가족 제도와 관련되어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는 옛날 우리나라처럼 보통 3-4대가 대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행동이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진 가장이 경제적 파산에 이르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경제적인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가족 중 어느 누구 하나가, 특히 가장이나 어른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범죄 하게 되면 그 가정이 함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안 좋은 영향을 받았더라도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능히 이러한 악행과 고통을 끊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 우리들이 가족 중 누군가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을 나의 십자가로 여기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보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죄는 3-4대까지이고 은혜는 1000대까지 미친다는 ‘3-4대’와 ‘1000대’라는 불균형의 대비입니다. 하나님은 벌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주시고, 벌을 주어야 한다면 당대의 한 가족으로 제한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복은 될 수 있는 한 많이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이처럼 죄와 벌은 대물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과 은총은 계속 대물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수아 24장 2-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여 24:2-3)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의 집안도 우상을 숭배하는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준행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하나님의 손길 안에 확실하게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내 아들, 내 딸, 내 자손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지고 귀한 유산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므로 천대에 복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4. 사람의 방식 하나님의 방식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형상화를 금지 하셨을까요? 보통 신앙의 대상이 형상화되면, 그 형상은 자연스럽게 신 자체와 동일시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라는 말씀처럼 탐심이 우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모세의 놋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광야 시절에, 모세의 놋뱀은 독뱀에 물린 자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놀라운 성물이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9)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놋뱀은 그 자체에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 곡해되고 맹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후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러 모세의 놋뱀은 우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한때 치료의 능력을 전달하는 은혜의 상징이었던 모세의 놋뱀을 제거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형상화는 창조주를 피조물로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형상이 되는 순간부터 여호와 하나님은 형상 안에 갇히며, 인간의 경험 안에 귀속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갇혀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형상화 금지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이 세계의 어떤 피조물과도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창조주시며, 어떤 형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초월적인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친히 피조물인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 http://blog.daum.net/originalstone/16907030 )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섬겨야지, 우리가 상상하는 모양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의 ‘너를 위하여’[르카]라는 단어는 자기중심적으로, 혹은 자기 취향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믿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자기 구미에 맞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그 사람을 알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저희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희들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 때때로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이제 말씀을 붙들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천대에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나 자신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만을 더욱 사랑하므로 천대에 복을 받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어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붙들고 2-3분간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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