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안에서 찾아본 이민 교회 성도의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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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서 찾아본 이민 교회 성도의 강점
이사야 53장 1-3절
사도신경
성경봉독: 본인이 다 읽기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멘트: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약할 때 강함되시네> 함께 찬양드리신 후에 말씀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시간 이사야 53장 1-3절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찾아본 이민 교회 성도의 강점>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4월 6일자 기독일보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인 새들백 교회에서 실시하는 리더쉽 훈련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Strengths Finder”라는 테스트인데요, 한국말로 하면 “강점 찾기 테스트”입니다.
이 “Strengths Finder”는 한국에서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혁명』이라는 책으로 소개되었는데, 이 책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왔다.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은 화술 강좌에 등록하고,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프레젠테이션 강좌에 등록한다. 가장 성과가 약한 일에 자신의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꼴이다. 그러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적 과정이 아니라 피해나 손실을 줄이기 위한 소극적 수단일 뿐이다. 성공의 비밀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 강점에 있다. Strengths Finder는 약점을 보완하는 데에 집중되었던 모든 관심을 강점에 쏟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저는 이런 기사의 내용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가진 강점을 찾아서 그것을 더욱 개발한다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아마도 더욱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강점이 이왕이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큰 인생의 목표는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분의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강점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이 되실텐데요. 어쩌면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내 안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별로 없어보여서 찾다가 조금은 자신에게 실망이 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감사하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뛰어난 능력과 재물과 명예와 권세와 강점이 될만한 자랑거리가 없을지라도,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 모습만큼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강점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모습은 무엇일까요?
1. 비천한 내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강점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천해 보이고 못나 보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멋진 차를 타고 멋진 옷을 입고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대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비천해 보이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비천해 보이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제가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학생 중에 지금 한국에 가서 살고 있는 자매가 자신의 SNS에 한국말로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나 살면서 최선을 다 했는데도 못하면 그때 내가 진짜 못난 걸까봐 그게 겁나서 ㅠ”
자신이 살면서 하고자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 일을 잘 못하게 되면 그때는 자신이 진짜 못난 사람일까봐 겁나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마음이 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 자신도 부족하지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도 없고, 결국 그것이 인생의 자산이 되고 밑거름이 되니 걱정할 필요없어, 주님 뜻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손해볼 것은 없어. 힘내!’
이렇게 우리들은 때때로 나 자신이 비천해보이고 나 자신이 못나 보이는 것이 싫고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가뭄으로 죽어가는 고목에서 나온 한 줄기의 연약한 나뭇 가지처럼 몰락한 유대의 다윗 왕조의 이름없는 후손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날 때에도 깨끗한 병원이나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따뜻한 방안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운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어린 시절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조용히 평범한 목수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그분에게는 집안의 재력이나 학벌이나 명예 등 사회적 강점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 누가 보아도 사모하거나 공경할만한 구석이 없는 그러한 모습이셨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모습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2절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더 아름답고 멋지고 누가 보아도 “야 정말 대왕다운 풍채야”라고 할만한 분이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 분들 한 번 보세요. 어떠신가요? 정말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많이 보이시지 않나요? 예수님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없으신 분들이 많지 않으신가요? 막 화려하고 예쁘고 멋지고 잘나고 정말 고귀해 보이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으신가요?
‘칭찬하는거야 놀리는거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예수님도 그런 모습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동네 한인마트에 나가면 지나가는 분들 중에 머리 빗어드리고 싶은 분들이 그렇게 많더라고요. 머리가 눌리고 하늘로 솟구쳐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저분의 삶에는 어떠한 애환이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우리 이민 교회 성도님들께서 하늘 일들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 더러운 일,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시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요. 우리 같은 비천한 자를 정말로 귀히 여기시고 돌보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우리들을 구원하셔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6:2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비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택하시고 들어올리셔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뤄가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26-29에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보면, 그 당시 그리 존귀히 여겨지던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왕관을 쓴 왕족도 아니었구요, 비단 옷을 입고 다니는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속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아주 가난하고 순박한 시골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일하고, 집에서는 집안일을 돌보며 허드렛일을 하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택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시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이렇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눅1:46-50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이 찬양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예화: 깨어진 물항아리> 금이 가고 조금 깨어진, 오래된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온전한 것들과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물을 길어 오는 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인은 깨어진 물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깨어진 물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온전치 못하여 주인님께 폐를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구한 물이 새어 버리는데도 나를 아직 버리지 않으시다니….’
어느 날, 물 항아리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고 온전한 새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로 소용가치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그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물 항아리를 지고 계속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을 지나면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그제야 깨진 물 항아리는 그들을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길을 보았습니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듯 싱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여기에 이토록 예쁜 꽃들이 피어 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모두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 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할렐루야! 이것이 오늘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 안에 비천해 보이는 모습이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구석이 없는 것 같고, 모자란 것 같고, 부족한 것 같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고, 들어 올리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는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비천해 보이는 나의 모습도, 남들에 비해 모자라 보이는 나의 모습도 하나님 앞에서는 강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 주변에 비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도우며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삶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고난과 슬픔과 고통을 아는 내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강점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호령하는 왕으로 등극하신 것이 아니라,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쫒으시고,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며 가난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실 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버렸고, 그를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삼년반 동안 온갖 고생을 함께하며 예수님의 기적을 맛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 조차도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난 앞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보면, “간고”, “질고”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데, “간고”는 ‘고통, 괴로움, 슬픔’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질고”는 ‘질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며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셨고, 우리의 죄와 사망을 대신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극한의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셨기에,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아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민 교회 성도분들 가운데에도 세상속에서 멸시받고, 버림받고, 슬픈 일을 많이 겪고,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모습이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강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강점은 겉으로 편안해 보이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알고 고독을 알고 슬픔을 알고 병고를 알고 비천을 아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듣고는 했습니다.
‘이민 교회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드세’
그런데 제가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까 이민 교회 성도님들은 “겉바속촉”인 분들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겉바속촉”이 뭐냐면, 요즘 사람들이 튀김이나 빵 같은 음식을 먹을 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맛있다’고 해서 사용하는 줄임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고생을 많이 하고 풍파를 많이 겪어서 겉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시기도 하지만, 속사람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려고 하고, 맛있는 거 있으면 나눠주려고 하고, 자신도 어려우면서 다른 사람 걱정해 주고, 그러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민 교회 성도님들은 타국 생활하면서 고난을 많이 당해봤기 때문에 고난 당한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고, 질병이 찾아와도 병원비 때문에 제대로 병원도 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시달려 봤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고,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시안이라고 멸시와 차별을 당해봤기 때문에 그처럼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외롭게 살아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깊은 바다와 같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진실로 위로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달리 아직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강점을 살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잘 실천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예수님 없이 살아가던 지난 날 내가 얼마나 비천한 가운데 있던 사람이었는지, 지난 날 내가 얼마나 큰 고통가운데 살아 왔는지, 지난 날 내가 얼마나 외롭고 슬프게 살아 왔는 지를 쉽게 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어른이 되면, 아이들이 조그만 일에 힘들어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15:15 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분명히 제가 예전에 정말 힘들고 외로웠을 때는
‘지금의 시간을 잘 이겨내어서 나중에 나와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 같은데, 그러한 일들이 다 지나가고 새로운 고민과 고난에 직면해 있는 현재의 상황이 되니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대할 때에 종종,
‘내가 과거에 겪은 고난과 외로움과 슬픔은 훨씬 더한 것 같은데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렇게 힘들어 하지.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텐데, 사람들이 참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
라고 생각하고만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짐을 덜어주시고,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제하여 주실수록 때때로 그 해방감에 도취되어서(해방된 기쁨에 도취되어서), 그 구원의 은혜에 도취되어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을 잃어버린 체, 우리에게 있는 그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비천함과 고난의 풀무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눅 4:18 에서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 하셨듯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흠 없고 거룩한 존재로 빚으셔서(골1:22),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벧전2:9).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부르심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첫사랑 회복하기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에게 여전히 기도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고난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절반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였으며 지혜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신령한 사도였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약점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후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우리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강함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가시가 있고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더 깊이 연합할 수 있다면,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역사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가시가 있는 것이 훨씬 더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보시기에, 만일 지금 저에게서 좋게 느껴지는 모습들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지금 제 안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통과 가시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셔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우리를 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여러 가지 기도제목들을 놓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험과 환란이 꼭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또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받는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이사야 53장의 4-5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고난 받지 않으시고 대신 죽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과 저주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환란과 슬픔과 고난과 아픔 가운데서도 하늘의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구원의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 덕분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 수가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영적 저술가인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의 사역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 입니다.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으시고 온 인류의 구원의 산소망이 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비천함과 연약함을 들어서 죽어가는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시도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겨서 우리 주변에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 슬픔과 외로움에 빠진 이웃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을 많이 당하고 상처가 많고 고난을 아는 드샌 이민 교회의 우리 형제 자매들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사랑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는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말씀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사랑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함도, 우리의 약점도, 주님 안에서는 강함이 되고 강점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 구원하여 주시고, 고통과 환란에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신 주님. 우리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도 주님처럼 비천한 자를 더욱 귀히 여기며,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시간 다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비천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고통과 슬픔과 질병을 경험하며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러한 우리의 모습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 하나님 안에서는 강점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 주시고,
1.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미국의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한국의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미국과 한국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
북한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 위해서 (북한의 동포들과 함께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 속히 다가올 수 있게 하옵소서)
2. 순복음타코마제일교회을 위해서
최병삼 담임목사님과 류현영 사모님을 위해서
재직들과 섬기는 자들을 위해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Amos(백혈병), Nick(약물중독), Monica, Alexsandria, Barbara(우울증), Michael Jones(루마티스 관절염, 심장병), Rena Collins(두통, 심장), 이영희 집사(암 치료됨), 김희주 집사(감옥),
온갖 부인병과 성인병,
후원하는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말레이시아 사라왁 신정채 선교사
인도네시아 메단 백진식 선교사
터키 앙카라 박성철 선교사
체코 진은숙 선교사
스페인 문기중 선교사
이집트 강완식 선교사
과테말라 홍근식 선교사
루마니아 부크레슈티 채정기 선교사
캄보디아 깜뽕톰 전성용 선교사
속초한세순복음교회 박영철 목사
예닮 공동체 김종호 목사
3. 코로나 19의 종식을 위해서
부작용이 없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공급되어지도록
모든 상황이 다시금 정상화 되어지고
예배가 정상화 되어질 수 있도록
경제의 회복을 위해서
4. 우리의 자녀들과 기도의 제목들을 위해서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찬양드리신 후에 기도하겠습니다.
다함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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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나 낮이나 어제나 오늘도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미래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한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주님안에서 모두 응답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심령마다 주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시고 모든 삶속에 역사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믿음을 가지고 정성스레 헌물을 준비한 손길들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흔들어 넘칠만큼 풍성하도록 채우시는 주님의 약속위에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드려진 손길마다 나누고 베풀며 선교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는 믿음의 부자 지혜의 부자들이 다 되도록 은혜베풀어 주옵소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